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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하 Jul 09. 2023

바보야 문제는 춤이 아니야

  잠깐이라도 춤을 추지 않은 날은 헛된 날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초등학생 때 가장 부러웠던 친구는 짝꿍 수미였다 구불구불한 긴 머리에 하얀 얼굴, 그리고 커다란 눈을 가진 수미는 마치 인형 같았다. 집이 같은 방향이라 학교가 끝나고 함께 집에 가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혼자 가라고 했다. 친구를 데리러 온 엄마와 같이 벌레를 배우러 간다고 했다. ‘벌레를 뭐 하러 배우나?’ 이상하긴 했지만 왠지 묻기가 부끄러워서 그냥 혼자 집에 갔다.

어느 날 수미네 집에 놀러 갔다가 거실 벽에서 예쁜 날개 옷을 입고 화려하게 화장을 한 친구의 사진을 보았다.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는데 친구는 친절하게도 날개옷을 가져다 보여줬다. 그전까지 방과 후에 배우러 다닌다고 생각했던 ‘벌레’는 바로 ‘발레’였다. 그전에 발레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터라 내 귀에는 벌레로 들렸던가 보다. 부러워하는 나를 보며 그 아이는 ‘너도 같이 하자’며 직접 몇 가지 동작도 보여줬다. 정말 부럽고 샘이 났지만 발레를 배우지는 않았다. 아니 그날 집에 돌아가서 발레를 하고 싶다는 말도 못 꺼냈다. 말을 해도 안 시켜줄 것 같았다. 그것보다도 ‘너 같은 애가 무슨... 발레는 수미처럼 인형같이 예쁜 애만 하는 거야’라는 열 살짜리 꼬마의 혹독한 자기 검열 때문이었다.

이후 학예회나 발표회 등에서 발레 공연을 몇 번 봤다. 하늘하늘한 발레복을 입고 예쁘게 춤을 추는 아이들은 천사처럼 보였다. 그 아이들은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여전히 부러웠지만 한편 안심이 되기도 했다. 어차피 나는 할 수 없는 것을 안 한 것뿐이었으니까...



중학생이 되자 체육 시간 외에도 1주일에 1~2시간씩 무용시간이 있었다. 첫 무용시간,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신 무용 선생님은 역시나 인형처럼 예쁜 분이었다. 수업을 소개하면서 앞으로 배우게 될 발레 동작을 하나 보여줬는데 곳곳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나의 생각이 옳았다. 발레는 나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무용실에서 실기수업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나도 발레를 배운다는 생각에 잠깐  들떴던 것 같다. 발레리나처럼 토슈즈를 신는 건 아니었지만 나름 연습용 슈즈를 신고 바를 잡고 다리를 올려봤다. 우아한 발레리나를 그리며… 하지만 거울 속에 내 모습은 엉거주춤,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누가 볼까 얼른 다리를 내리고 반 아이들 속으로 숨어들었다. 고등학생 때까지 5년 넘게 무용 수업을 했는데도 별다른 기억이 없는 걸 보면 무용은 생각보다 재미없었나 보다. 아니 발레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라 굳게 믿고 제대로 할 생각도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랬다. 할 수 있는 것, 없을 것 같은 것들을 스스로 나누고, 못 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예 시도도 안 했더랬다. 특히 춤이나 운동처럼 재능이 전혀 없는 분야를, 더구나 남들 앞에서 보여줘야 한다면 더욱 움츠러들었다. 잘 못하면 부끄럽고 망신스러우니까. 그러느라 잘하는 건 책 읽기와 글쓰기 밖에 없었다.

춤을 못 춘다고 해도 크게 불편할 건 없었다. 소풍이나 축제 때 반 대표로 무대에서 춤을 추는 아이들을 보면 다시 부러움이 솟았지만, 그런 날들은 일 년에 몇 번 안 됐으니까. 오히려 춤을 잘 추는 아이들을 선생님들은 ‘요주의 인물’로 꼽고 감시의 눈길을 주던 시절이었다. 모범생 코스프레를 하던 내가 춤을 못 추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데 춤만 문제였을까? 성인이 된 후 언젠가부터 글쓰기가 싫어졌다. 초등학생 때는 온갖 글쓰기 대회에 나가서 늘 상을 받을 정도로 글쓰기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이후 학교 공부에 집중하게 되면서 몇 년간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 대학에 들어간 후 갑자기 글을 쓰려니 글이 써지지 않았다. 선배들이나 친구들이 쓴 글을 읽으면 너무나 멋있고 훌륭해 보였다. 그런 멋진 글을 쓰는 그들이 부러웠다. 용기를 내 써봤지만 그냥 찢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못난 글을 누군가 읽게 놔두겠다고…? 사람들이 읽고 비웃을 걸!’이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10년쯤 전에 내 안의 욕망을 가로막았던 자기 검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은 그의 저서 <신화와 인생>에서 이런 자기 검열, 내면의 속박된 자아를 ‘용’이라고 불렀다. 그는 또한 이 용을 죽여야만 비로소 삶에서 삶을 재창조할 수 있다고 했다.

자기 검열의 늪에서 빠져 살던 20대, 나는 마치 용이 지키는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처럼 살았다. 그 이후라고 나을 게 없었다. 30대를 거쳐 마흔 살이 넘을 때까지 나의 삶은 용과의 처절한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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