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를 이야기할 때 그가 말년에 음악과 춤을 배웠고 또 아주 만족스러워했다는 것보다 더 주목할 만한 사실은 없다.
– 미셸 드 몽테뉴
소크라테스는 나이 70에 춤을 배웠다. 요즘으로 쳐도 좀 늦은 나이 같다. 상당한 고령에도 그가 춤을 배우려고 했던 건 그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방치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춤을 추던 사람들도 은퇴하고 쉴 나이지만, 그는 배움이 아주 만족스러웠고 즐거웠다고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잘해야 한다, 춤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서른 살 때 처음으로 춤을 배웠다. 소크라테스보다야 훨씬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에도 ‘이제 와서 춤은 배워서 어디에 쓰게? 그럴 시간에 공부나 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 미국에서 경영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미국에 오기 전에 이미 안티구아, 지브롤터 등에서 3년 가까이 살았던 터라 영어에는 많이 익숙해진 상태였다. 학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던 건 아니지만 실무를 6년 넘게 경험했으니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영어를 잘하는 것과 영어로 무언가를 공부하는 것은 전혀 달랐다. 게다가 처음 듣는 회계시간은 제3의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어려웠다. 너무 오랜만에 공부를 하다 보니 오래 앉아 있는 것도 힘들었다. 어영부영 한 학기를 보내고 난 후에 받아본 첫 성적표는 끔찍했다. 우리나라 대학의 학사경고에 해당하는 ‘probation’을 받고, 장학금 지급 중단 소식을 듣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학과장 사무실에 찾아가 눈물로 반성하고 사정한 끝에 장학금은 다시 받을 수 있었지만, 2학기에 개선되지 않는다면 퇴학당할 수도 있다는 경고도 덤으로 받았다.
퇴학당하지 않고 장학금을 계속 받기 위해서는 1학기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성적을 올려야 했다. 그야말로 집과 학교, 도서관만 왔다 갔다 하면서 공부해야 했는데... 체력이 안 받쳐줬다. 힘들기도 하고 속상한 마음에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공부하는지 물어봤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친구들이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학생들과 다른 국적의 학생들의 공부 생활에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의 외국 학생들은 공부만 열심히 하는 반면에 미국 학생들은 체력을 위해 운동을 한다고 했다. 학교 안에 있는 호숫가를 따라 뛰거나 체육관에서 운동을 한다고...
‘그래, 바로 이거야.’ 유레카를 외치며 미국 학생들을 따라 운동을 하기로 했다. 달리기는커녕 걷기도 싫어했던 터라 체육관을 찾았다. 체육관에는 헬스클럽처럼 기구가 있는 곳과 수영장, 농구장, 탁구장, 스튜디오 등 다양한 공간이 있었다. 할 줄 아는 운동이 없었던 터라 그냥 실내 자전거만 탔다. 재미없고 지루했지만 쓰러지지 않고 공부하기 위해 한 시간 정도는 버텼던 것 같다.
운동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가던 어느 날, 체육관 2층에서 신나는 음악이 들렸다. 홀리기라도 한 듯, 음악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살짝 문을 열고 보니 열 명 정도의 학생들이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억지로 자전거 바퀴를 돌리고 온 나와는 달리 모두들 웃으며 즐거운 표정이었다. 안티구아의 클럽에서 처음 느꼈던 ‘또 다른 세상’을 한번 더 느꼈다. 춤이 끝난 후에 물어보니 ‘브라질 댄스(Brazilian Dance)’라고 했다. 진짜 브라질 출신 강사가 진행하는 댄스 수업이었다. 이렇게 재미있게 운동을 할 수 있다니... 다시 한번 유레카를 외치며 바로 다음 시간부터 수업에 참여했다.
사실 안티구아에서 클럽 댄스에 빠지면서부터 춤을 배우고 싶었다. 막춤이 아니라 제대로 잘하고 싶었다. 춤을 배우겠다는 나에게 친구들은 “춤은 배우는 게 아니야. 음악을 느끼며 그냥 추면 돼.”라고 했지만 그 “그냥”이 뭐란 말인가? 도무지 알 수 없었기에 배워서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지브롤터(Gibraltar) 사무실로 옮기게 되면서 카리브해 클럽 댄스와는 이별하게 되었다. 지브롤터에서는 승진을 하며 업무가 좀 더 많아졌고, 대학원 준비를 하느라 춤을 배울 여유 따위는 없었다. 다만 가끔 스페인에 놀러 가서 플라멩코 공연을 볼 때가 있었다. 예쁜 치마를 입고 멋진 춤을 추는 댄서들을 보니 이번에는 플라멩코가 너무도 배우고 싶어졌다. 하지만 플라멩코 역시 그냥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어릴 적 발레를 하는 수미를 보며 느꼈던 좌절감이 플래시백처럼 떠올랐다.
2년의 준비 끝에 대학원에 합격했고, 이번에는 미국으로 이사했다. 쉽지 않은 공부였고, 학사경고까지 받다 보니 공부에만 집중하려 했다. 그렇게 내 안의 춤바람은 멈추는 듯했다. 그런데 뜻밖의 시간과 장소에서 춤을 배우게 됐다.
브라질 출신의 춤 선생님은 아담한 체형에 영어가 다소 서투른 귀여운 여인이었다. 리우 카니발 영상에서 봤던 큰 체형의 브라질 댄서들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브라질 댄스라니 삼바(Samba)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어떤 리듬인지, 어떻게 추는지는 잘 몰랐지만 한 트로트 가수가 불렀던 노래 덕인지 친근함 마저 느껴졌다. 당연히 삼바를 배우리라 기대하며 첫 수업에 들어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빠른 음악이 시작되었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자 귀여운 선생님은 사라지고,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댄서만 남았다.
‘우와, 저걸 내가 따라 해야 하다니…’
한숨이 절로 났다. 나의 한숨을 들었는지 선생님은 웃으며 말했다.
“따라 하지 않아도 괜찮아. 똑같이 안 해도 돼. Just shake your booty.”
음악에 맞출 것도 없이 그냥 엉덩이를 흔들면 된다는 말이었다. 나한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는지 모두들 웃으며 즐겁게 몸을 흔들었다. 그래도 수업이다 보니 스텝이나 동작을 설명하는 시간이 있었다. 모든 설명의 결론은 ‘It’s OK. Just shake your booty’였다. 춤은 어렵거나 감탄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워야 한다는 게 선생님의 ‘춤 철학’이었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면서 기본 동작과 안무도 점점 익숙해졌다. 간단한 삼바 스텝도 배웠다. 특히 스텝은 잘한다며 칭찬을 듣기도 했다.
‘나 춤에 소질이 있었던 건가?’ 착각을 하기도 했다.
춤을 배우며 얻는 에너지가 일상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는 여전했지만 배출구가 있기 때문이었을 거다. 표정이 밝아지고 팀원들과 같이 과제를 할 때 말도 많아졌다. 경영대학원에서는 팀워크가 성적에 매우 중요하다. 팀에 대한 공헌도가 높아지면서 팀원들의 평가도 좋아졌고 성적도 향상되었다.
같은 팀원으로 친하게 지냈던 티파니가 변화를 눈치채고 물어봤다. 사실 그동안 춤 배우러 다닌다는 게 민망하기도 하고, 공부 안 하고 시간낭비 한다는 소리를 들을 까봐 몰래 다니고 있었다. 비밀을 말하자 티파니는 재미있겠다며 자기도 같이 하겠다고 나섰다. 몇 달 먼저 배운 내가 어려운 동작과 스텝을 알려주기로 했다. 드디어 저도 다른 사람에게 춤을 가르쳐줄 위치가 된 것이 기뻤다. 더구나 그동안 부족했던 회계와 통계수업을 도와줬던 티파니에게 은혜를 갚게 됐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그날 당장 같이 댄스 클래스에 갔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티파니에게 동작과 스텝을 가르쳐줬다. 티파니는 어려워하면서도 곧잘 따라 하는 듯했다. 선생님이 오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음악이 흐르자 우리는 선생님을 따라 안무에 맞춰 춤을 췄다. 새로 온 사람들을 위해 선생님은 또 “Just shake your booty”를 외쳤다. 흘낏 옆을 보자 티파니는 선생님의 말을 따라 열심히 엉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안무에 맞춰 동작을 잘 따라 하는 나보다 티파니가 더 멋진 춤을 추고 있었다. 음악이 끝나자 선생님은 티파니에게 혹시 그전에 춤을 배운 적이 있냐며 너무 잘한다고 칭찬을 거듭했다.
그랬다. 석 달이 넘게 배운 나보다 처음 온 티파니가 훨씬 더 잘했다. 아마도 티파니의 DNA에 춤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기가 막히기도 하고, 그런 그녀를 가르치겠다고 했던 내가 부끄럽기도 해서 한참을 같이 웃었다. 수업이 끝난 후 재능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나를 위로하며 티파니가 말했다.
“타고난 게 아니야. 그냥 선생님 말대로 음악에 몸을 맡기고 흔들었을 뿐이야.”
그냥 흔들어도 그렇게 멋진 춤이 되는 건 언제쯤에나 가능하게 될까? 이번 생에 가능하긴 한 걸까?
이미지 출처: https://www.faena.com/aleph/articles/wonderful-advice-from-socrates-and-nietzsche-dance-dance-al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