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벨리 댄서는 춤을 통해 삶과 죽음, 행복, 슬픔, 사랑 그리고 분노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품위와 자존감을 먼저 갖춰야 한다.
- Roman Balladine & Sula
격동의 이집트에서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일상은 너무나 평온했다. 시내로 들어가는 수십대의 탱크를 보며 울컥했던 것도, 생지옥이 따로 없던 공항에서 발을 동동 굴렀던 것도, 지난 3주간의 일들이 모두 꿈인 듯했다. 그렇게 아련해지는 기억 속에서도 생생한 한 가지가 있었다. 짐을 풀기도 전에 먼저 벨리 댄스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알아봤다. 우리 동네에도 배울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싶었다. 뜻 밖에도 학원, 문화센터 등 여러 곳이 있었다. 퇴근하고 배우러 갔다가 집으로 오는 동선이 가장 편한 곳은 집 근처의 백화점 문화센터였다. 초급반, 중급반이 나뉘어 있고 1주일에 2회에 가격도 적절해서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딱 좋아 보였다. 1학기-3개월을 등록했다.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신발은 어떤 걸 신어야 할지, 선생님은 어떤 분인지, 어떤 사람들이 배우러 오는지...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접수 직원은 그냥 편한 옷으로 입고, 신발도 필요 없이 맨발로 오라고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간 첫 수업. 의외로 나이 들어 보이는 학생들이 많았다. 내가 제일 어린것 같기도 했다. 선생님은 이집트에서 봤던 댄서와는 달리 작고 아담한 체형이었다. 안심이 됐다.
편한 옷을 입으라 해서 정말 면티에 요가바지를 가져갔는데, 그렇게 편한 옷을 가져간 사람을 나 밖에 없었다. 화려한 의상은 아니었지만 배를 드러낸 탑과 스커트에 힙스카프를 갖춘 연습복이었다. 다행히 나에게도 이집트에서 사 온 힙스카프가 있어서 요가바지 위에 둘렀다. 첫 시간이라 그런지 배를 드러내는 것이 왠지 민망해서 혼자 가리고 했다.
초급이고 또 첫 시간이라 예상한 대로 아주 기초 동작부터 시작했다. 벨리 댄스는 처음이지만 1년 이상 브라질리안 댄스를 배웠으니 쉽게 따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전혀 쉽지 않았다. 브라질리안 댄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댄스가 다리와 팔 등 사지를 이용한 동작이 많은 반면 벨리 댄스는 몸통(torso)과 골반을 이용한 동작이 많다. 또 다른 댄스들이 상체와 하체를 같이 움직이는데 반해 벨리는 상체와 하체를 분리해서 움직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배와 가슴 등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부분을 움직여야 해서 어려움이 많았다. 첫날이라 많은 동작을 배운 것도 아니고 잘할 거라 기대도 안 했지만... 기대 이하로 처참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선생님과는 너무도 달라서 마치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 인형 같았다. 브라질리안 댄스를 처음 배울 때의 절망감이 다시 밀려왔다. 하지만 춤의 기본은 즐거움. 이번 선생님도 역시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재미있게 하라며 신나는 음악과 함께 수업을 마쳤다.
다음날, 제대로 따라 하지도 못한 것 같은데 여기저기 아팠다.
‘내가 왜 이걸 한다고 해서…’
후회가 밀려왔지만 3개월치나 끊었다.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 쓰는 일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 달리기는 너무 느렸고, 공이 무서워서 구기종목도 못 했고, 팔 힘이 없어 던지기나 매달리기도 못 했다. 나처럼 타고난 몸치에게 몸통과 골반을 그것도 그 둘을 분리해서 움직여야 하는 벨리 댄스는 고문과도 같았다. 선생님의 유연한 몸놀림을 보면서 ‘나는 언제쯤 비슷하게라도 될 수 있을까? 이번 세상에서는 틀린 것 같다’며 한숨을 쉬곤 했다.
알고 보니 선생님은 어렸을 때부터 춤을 췄고 대학에서도 한국무용을 전공했다고 한다. 그럼 그렇지, 오랫동안 춤을 췄으니 당연히 쉽게 배웠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벨리 댄스는 한국무용과 몸을 쓰는 방법이 완전히 다르고 사용하는 근육도 다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배웠단다. 벨리 댄스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은 그때도 가끔씩 고전무용의 손동작 등이 나와서 안무를 망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쩌면 다른 춤습관이 없는 내가 더 빠르게 익힐 수도 있다고 격려를 잊지 않았다.
선생님의 격려 덕분인지 하나씩 익숙해지는 동작이 늘어갔다. 그냥 흉내를 내는 정도였겠지만... 그런데 아무리 따라 하려 해도 안 되는 동작들이 있었다. 안 되는 동작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먼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원리를 몰랐다. 선생님이 하는 걸 보고 따라 하는 걸로는 안 되었다. 어느 부위를 어떤 순서로 움직여야 하는지 듣고, 머리로 이해해야만 몸으로 따라 할 수 있었다. 가장 몸 적인 걸 하면서도 머리가 먼저 움직여야만 하다니... 평생 ‘머리’를 우선시하며 살아왔던 탓이겠다. 어쨌든 머리가 이해하면 몸이 따라와 주긴 하니 다행이었다.
움직이는 방법을 이해해도 안 되는 동작이 있었다. 이런 경우는 힘을 잘 못 주고 있을 때였다. 벨리에는 힘을 줘서 강하게 움직여야 하는 동작이 있는가 하면 힘을 빼서 자연스럽게 움직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배를 사용하는 웨이브나 언듈레이션 등의 동작은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배가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배에 힘을 빼면 배가 나온다. 가뜩이나 배가 드러나는 춤인데 배를 나오게 한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배가 안 나와 보이도록 잔뜩 힘을 주고 있으니 동작이 될 리가 없었다.
“힘 빼세요”라는 선생님의 말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그때는 춤동작을 잘하는 것보다 날씬한 내 모습이 더 중요했다.
움직이는 방법을 이해하고, 힘을 제대로 사용해(한다고 생각해)도 안 되는 동작도 있었다. ‘떨기춤’으로도 알려진 가슴과 몸통을 빠르게 움직이는 동작이다. ‘슈미’라고 하는 이 동작의 비밀은 가슴이나 몸통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어깨를 앞뒤로 빠르게 흔들어서 가슴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거였다. 그런데 평소에 어깨를 움직일 일이 없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일부러 강하게 어깨를 앞뒤로 움직여 보기도 했지만 등이 움직일 뿐 떨기춤과는 비슷하지도 않았다. 친절한 선생님은 로봇 같은 나의 움직임을 보면서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동작은 원래 오래 걸려요. 연습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되는 날이 올 거예요.”
갑자기 되는 날이 올까 싶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랬다고 하니 믿어 보기로 했다. 단 그날은 저절로 오는 건 아니라 ‘연습하다 보면’이라고 하니, 틈틈이 연습하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