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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형 Feb 26. 2021

생경한 풍경 - 응급실 2

세월과 의사의 권위



정말 미친 듯이 일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랬다. 사실 후유증이 커서 그 시절을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려는 심리가 지금도 작동한다.



지나치게 일에 몰두한 대가로 비록 응급실을 향했지만 사실 질병에 대한 염려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런데 침상도 없이 숙련된 전문의를 구경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초보 닥터들과 며칠 밤을 보내면서 몸과 마음이 완전히 그로키 상태에 빠져 버렸다.



응급실 침상을 배정받지 못해 대기실 의자에 쓰러지듯 기대 있을 때의 일이다. 응급실에서 대기 중이라 병원의 넓은 다른 의자로 옮기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금식 상태로 물도 마실 수 없어 기력이 바닥난 데다 호흡기 질환이 악화되어 호흡 자체가 어려웠다. 곧바로 산소호흡기 처방이 내려졌고 간이 산소통이 따라붙었다. 입에는 투명 플라스틱 돔이 씌여졌다. 이젠 화장실도 가기 힘들어졌다. 하긴 갈 일이 거의 없었다. 수액 이외엔 신체에 아무런 인풋이 없으니 아웃풋도 거의 없었다.

감았던 눈을 간신히 떠보니 밤이 되었고 어찌어찌 연락받은 친구가 곁에서 측은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날 밤은 그 친구가 간호하겠다고 가족을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가 큰 소리로 간호사를 불러댔다. 담당 간호사가 오고 뒤이어 의사가 나타났다. 난 몽롱해진 의식 탓에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산소통이 바닥난 것이었다. 그런 상태로 밀착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니 호흡 상태는 더욱 좋지 않았다. 아마 내가 눈을 뜬 것도 살기 위해 반사적으로 이어진 행동이었을 것이다. 위급한 상황임을 인지한 친구가 항의했다. 그러나 별거 아니라는 간호사의 표정은 결국 친구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 이 환자의 악화된 상황에 대해 어떻게 책임질 거죠?


그 상황을 병원 상부에 알리고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친구의 엄포에 간호사와 의사의

태도가 급변했다.


- 제 때에 산소통을 교체 못해서 죄송합니다.

빨리 갈아드리겠습니다.


나에겐 그들의 대화가 먼 메아리처럼 들렸다.






정신없어 보이는 응급실도 자세히 살펴보면, 이미 웬만한 크고 작은 병원들을 돌고 돌아 내원한 경험  많은 환자들과 너무나 기초적인 사항 - 체온, 혈압, 기저질환, 발현 증상 등 - 을 번갈아가면서 묻고 또 묻는 초짜 의사들이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젊은 의사들은 최대한의 엄숙한 표정으로, 전문가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자세로 문진을 시도한다. 그러나 노련한 환자들은 애초에 그들에게는 권위가 장착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권위는 긴 세월과 풍부한 경험이 부여하는 훈장과 같은 것이니 그 나이에 그것을 갖추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래도  처음에는 환자로서 성의를 다해 질문에 답하지만 흰 가운을 걸친 또 다른 청춘이 다가와서 로봇처럼 같은 질문을 해대면 이건 뭐지?라는 심정이 되면서 그만 기분이 심드렁해져 버린다.


응급실의 초보 의사들이 주변 환자들을 다루는 것을 곁눈질해보면, 그들이 하는 주 업무는 담당 의사가 오기 전까지 시시콜콜 환자에게 캐물어서 기본 정보를 파악 전달하는 것이다. 제대로 임무 수행이 이뤄지지 않으면 나이 든 교수 의사가 중간급 후배 의사에게 환자 앞에서 역정을 내는 일도 있다. 이런 경우엔 그 이후 스태프 대기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응급실에서 하는 중요한 일은 또 있다. 담당 의사가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기 전에 꼭 필요한 사전 작업으로 신체 상황을 데이터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본 검사 담당인 셈이다. 만일 교수나 대선배가 나타나기 전에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기본 처치를 해야 한다. 핸드폰을 들고 머리를 조아리듯 환자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들의 권한으로는 기본적인 해열제 등을 처방하면서 환자의 해당과 전문의가 나타나기 전까지 환자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응급수술 등이 필요한 경우에는 선배들의 보조로 뛰면서 현장에서 경력을 쌓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그들의 열정에 대한 감동이 없지는 않으나 그보다는 숙달되지 않은 손길과 경험 부족에 대한 염려와 미더움이 더 컸다.



사실 환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의사보다 경력 많은 간호사들이 더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심신이 피폐해진 환자로서는 경력 있는 간호사, 친절한 간호사를 만나면 한없이 감격하게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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