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부터 기본 검사만 받으면서주말 내내 응급실 의자에 매달려 있었다. 월요일이 되어서야 가끔씩 중년의 의사들이 응급실에 모습을 비추었고 좀 더 자세한 검사들이 진행되었다. 응급실 환자들의 경우, 필요한 검사가 일반 환자에 비해 우선적으로 진행되었다. 응급 환자는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때 내 휠체어를 밀고 검사실을 다닌 간호사는 젊은 남자였다. 일반 병동에선 보기 힘들던 남자 간호사였다. 하루가 지난 뒤 낯을 좀 익혔다싶어서 물어보았다. 당시는 간호대학생 하면 의례히 여학생을 떠올릴 때였다.
- 간호대학을 졸업하신 건가요? 병원에서는 간호사가 아닌 남자 직원도 병원 유니폼을 입고 환자들의 이송 등을 돕고는 했다. - 네, 간호과 학생들이 100명이면 남학생들은 약 10명가량 됩니다. -- 아, 전에는 남학생이 입학하면 화제가 되곤했었는데. 경우에 따라선 그나마도 자퇴하기도 한다고 들었거든요. - 네, 앞으로는 점점 더 남학생이 늘어날 것 같습니다.
일반 병실보다는 응급실에서는 힘을 써야 할 일이 많아 보였다. 병원 인력 배치상 남자 간호사를 응급실에 먼저 투여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를 도와주었던 남자 간호사는 젊고 쾌활했지만 체격이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힘없는 나의 손과 화색이 도는 그의 흰 손은 무척이나 대비되었다.
당시에는 어색했지만 고맙게도 그는 필요 이상으로 자주 미소를 보여주었다.
여전히 응급실 침대는 만원이었다. 플라스틱 대기 의자와 휠체어를 옮겨 다니며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이동식 응급 베드를 배정받았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119 응급 이송용 베드와 같은 것이었다. 그 베드는 당연히 고정된 장소가 없었고 적당히 복도나 한쪽 벽에 자리했다. 한마디로 응급실을 떠돌아다니며 온갖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모습을 접하게 되는 것이었다. 지금은 코로나 19 바이러스 전염을 우려해 병동에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지만 당시는 대개 환자당 한두 명의 보호자가 함께 지내기 마련이었다.
이동식 베드에 눕게 된 첫날, 다급한 앰뷸런스 소리가 연이어들려왔다.
먼저 3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구급대원들에 의해 실려 들어왔다. 간호사와 의사들이 달려들어 맥박을 재고 주사를 꼽았다. 환자는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온 몸이 젖어 있었다. 잠시 후 베드에서 베드로 소곤거리는 얘기가 전해졌다.
- 여자가 물에 빠졌데. 도대체 뭔 일인감? 쯧쯧. 살아날랑가 모르겠구만.
병원 가까이엔 서울 시내를 관통하는 한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연이어 40대 후반의 한 남성이 실려 들어왔다. 그를 태운 이동 침대가 지나가자 막걸리 냄새가 진동했다. 반팔과 반소매 차림의 그의 몸 왼쪽으로는 길게 상처가 나서 피가 흘렀다. 간호사들이 응급처치 용품을 가져오고 흙이 묻은 옷을 벗기려 하자 그는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베드를 건너 이야기가 전해졌다.
- 산에서 술 먹고 굴러 떨어졌다네. 아이고, 저 인간 마누라 속 꽤나 썩이겠어.
얘기의 근원지가 환자 본인인지, 환자 동행인인지, 의료진인지, 아니면 관찰자들의 상상력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응급실에서 새로운 환자의 등장은 늘 기존 환자나 보호자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든 그에 걸맞은 해석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 안에서의 납득할만한 스토리상의 전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얼마후 시간이 지나자 응급 처치를 받은 여자가 깨어났다. 그리고 그곳이 어디인가를 물었다. 대답을 듣자 곧바로 부끄러운듯 고개를 숙였다.
그 두 환자는 더 치료가 필요했기에 응급 처치실과 수술실로 이송되었다.
예전에 한 선배가 술자리에서 전했던 얘기다.
전전 직장의 동료는 바다낚시를 즐겼다. 가족의 원성에도 휴일마다 바닷가를 찾았다.
어느 날 다른 낚시꾼들과 마찬가지로 방파제를 넘어 거대한 콘크리트 테트라포트 위에서 찌를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