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형 May 06. 2021

하루 영업 살이

청이 부녀와의 조우



저녁 늦은 시간

지하철 객차의 자리가 한산해질 무렵

달리는 열차의 연결 통로 문이 열리자

허름한 옷차림의 한 여성이

아버지뻘로 보이는 눈먼 노인의 팔을 잡고

애를 쓰며 간신히 들어왔다



여인은 한 발을 끌듯이 걸었고

노인은 두 눈을 치껴뜨려 애쓰는 듯했다

그의 상체는 구부정하여 곧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남자는 한 손에 얇은 지팡이를 들었고

다른 손엔 지폐 몇 장이 든 파란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람 인자 형상으로 서로를 의지하며

나무의 자벌레처럼 객차 복도를 천천히 지나갔다



여인과 남자는 승객 어느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과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는 동작은

도와달라는 말보다

더 큰 중압감을 만들어냈다



눈앞을

슬로 모션으로 비틀거리며 지나가는 부녀  

바닥을 탁탁 치는 사내의 지팡이 소리가

객실 전체로 퍼져나갔고

가 든 바구니의 한 뼘짜리 종이돈이

 날카롭게 주변 사람들을 응시했다



시간이 주는 형벌



마주 보고 앉았던 승객은 조용히 눈을 감았지만

외면하지도 못한 두 눈은 최면에 걸린 듯

그들이 다른 칸으로 사라질 때까지 뒤를 쫓았다



적선을 했더라면 마음이 좀 가벼웠을까?

그것보다는 바구니에 손을 넣는 행위가

무거운 분위기를 깨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하루 마지막 구걸행의 주인공들이

심판자처럼 떠나가자

비어 가는 객실엔

검은 밤의 적막감만 흘러들었



객차에서 내려 잠시 서 있다가

문득 플랫폼 한쪽 끝을 바라보니

열차 복도를 지나갔던 청이 부녀와

또 다른 일행이 두 눈을 뜨고 모여 앉아

하루의 벌이를 한자리에 털어놓고

세어보고 있었다



멍한 느낌도 잠시

그제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제

어쩌지 못하는 무거운 기분이 아닌

가벼운 마음으로

그들의 하루 영업살이를 응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차산 둘레길에 핀 철쭉. 선명한 빛깔에 감탄이. 중앙하단 맨 밑의 꽃엔 벌손님도 함께 했다.










이전 04화 물과 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