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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형 May 11. 2021

아카시아꽃

5월의 향기


가까운 지방 도시에 사는 누님이

동영상을 한 편 보내왔다
아카시아가 군락을 이루어 하얗게 꽃을 피우고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누님이 기거하는 아파트동은 단지 끝이라

공원을 마주 보고 있다

사실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야산 언덕의 등산로를 약간 손질한 정도여서 자연 원형의 숲길이 거의 그대로 살아있다

덕분에 철마다 바뀌는 풍경과 숲의 표정이 생생하게 수시로 전송되어 온다

그러면 적적했던 대화는 생기를 얻고 이야기는 풍성해져 먼 옛날까지 흘러간다

숲 앞에서는 자잘한 슬픔과 노여움이 가만히 내려앉아 사그라든다


그렇게 랠프 에머슨을 공감했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읽어 내렸다


마침 친구와 가끔 걷는 아차산 둘레길에

아카시아 향이 가득하다는 전갈을 받았다

꽃의 표정은 하루가 짧게 달라지니

서둘러 가봐야 할 일이었다






5월이 되면 싱그런 여름을 맞이하는 계절의 여왕, 아카시아가 포도송이처럼 흰 꽃을 주렁주렁

매달고 향기로 세상을 점령하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이들과 형 동생이

함께 살던 넓은 한옥과
호랑이처럼 엄한 할아버지와

늘 손님들로 북적이던 사랑채가

홀로그램처럼 되살아난다


뒤뜰에 서면 뒷동산 언덕 위로 고등학교 사옥이 보이고 그 앞으로 수 십 년 된 아카시아

나무들이 줄지어 키 높았다
초여름 뒷방 한지문을 열면 위아래로 하얗게 꽃단장한 아카시아의 진한 향기가 

방안 가득 밀려들어왔다

우리는 밖을 맴도는 향기의 여신을 맞이하려고

자주 방문을 열곤 했

아카시아꽃 향 그윽하게 눈을 감게 만들었다


대청마루에서 유리문을 열고 언덕을 바라보면  바람 맞은 아카시아 나무들은

 허공에서 춤을 추듯 흔들렸다

밤중의 비바람에는 더욱 무섭게 몸짓하던

키 큰 나무들이

오월이 되면 한없이 너그럽고 다소곳한 표정으로 세상을 향해 달콤한 향기를 발산했다


활달했던 동네 친구들은 장대로 잔가지를 꺾어 꽃송이를 두 손 가득 들고 다니며

달콤한 꽃잎을 한입씩 먹어댔다
아이들보다 네다섯 배는 더 오랜 시간을 살아낸 가시 달린 아카시아는
해마다 5월이 되면 향기에 취한 아이들을

넓은 품으로 불러들였다


새까만 얼굴의 어린 소년들과 아카시아 흰 꽃의 넉넉한 위로가 언덕 풍경에 모자이크 되었다


몇 년을 그 나무들 아래에서 꿀을 맛보며 자라던 소년들이 타지로 떠나면 조무래기들이 그 자리를 넘겨받아 다시 긴 막대를 휘둘렀다
아이들의 유일한 경쟁자는 언덕 너머의

벌통에서 날아온 벌들뿐이었다

한 움큼 꽃을 훑어 입에 넣으려는 순간 게으른 벌이 튀어나와 코나 입을 침으로 쏘기도 했


아직 세상 근심을 모르는 아이들을 마냥 들뜨게 만들 꽃다발의 향연이
뜨거운 여름날을 맞이하기 전의 

마지막 위로였음을


어느 날 고향집 뒷동산이 잔디밭으로 말끔히 정비되어 눈길  곳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원목 데크길이 끝나자 옛 길이 나타났고 몸은 수시로 균형을 잡기 위해 좌우로 흔들리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아카시아는 숲 속 군데군데 무리 지어 피어있었다

그러나 미세먼지 탓인지 가뭄 탓인지 꽃송이는 생기가 부족했고 환하게 웃지 못했다

저녁에 비 소식이 예보되어 있었지만 예상 강수량은 미미해서 큰 기대를 할 수는 없었다

코로나 블루 시대의 살림살이가 산빛에도 투영되었다는 말인가...


친구와 시종 웃으며 옛 일을 떠올렸지만

눈 앞에 보이는 꽃다발의 표정은 언급할 수 없었다

그런 멘트는 서로를 우울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을 기억하고 기록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삶이므로! 

그리고 또 다시 계절은 돌아와

어김없이

꽃은 피고 향기는 멀리 퍼져갈 것을 알기에



사진이 어두워 꽃들이 선명하게 보이질 않는다. 이 풍경은 고향집 뒤뜰에서 바라보던 언덕 위의 아카시아 군락과 흡사하다.
등산로 주변에 황매화가 활짝 피었다. 찾아보니 황매화는 꽃잎이 5장이고 이 친구는 겹황매화 또는 죽단화라고 한다. 꽃말은 숭고, 기다림. 꽃을 살짝 볶아 차로 우려먹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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