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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형 Dec 04. 2020

한라산 유정

바람, 여자, 돌 그리고 바다


제주에 비가 내린다.


여기서는 어디를 가든지 섬 한가운데 우뚝 솟은 한라산이 보인다. 제주 할망이 상주하는 그 산은 늘 구름과 비를 불러 모은다. 수시로 가까운 바다, 먼바다에서 피어난 수증기들은 산기슭에 흰구름으로 춤추며 모여든다. 그 구름은 또 다른 구름을 불러들이고 서로 뭉쳐서 덩어리지면 마침내 초콜릿색 얼굴로 울먹이고 만다. 그리곤 기어이 독을 깨뜨리듯 미어진 가슴을 한가득 산아래로 쏟아낸다.


한라산은 간혹 옹기종기 조각구름을 정상 부근에 불러 모아 여러 동네의 얘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것도 지치면 뿌연 안개 장막을 온몸에 두르고 한가히 누워 쉰다. 어느 아침엔 작은 구름 고리를 도넛처럼 만들어 화관으로 쓰고 시집가듯 곱게 단장하고 앉는다. 또 다른 날은 구름 안개를 뜨거운 치즈처럼 골짜기마다 흘려보낸다. 마치 어머니가 더운 음식을 여러 자식에게 나누어주듯이.


그리고 어느 저녁엔 색색이 화려한 구름 옷감으로 치장하여 바라보는 이를 속절없이 울렁이게 만든다. 그때엔 그곳에 깃들어 사는 모든 짐승들의 눈동자에도 노을이 무늬 진다. 그리고 공중에 높이 날던 새들도 배가 부르든, 부르지 않든 서녘의 조각 빛이 사라질 즈음이면 서둘러 산 어미의 품으로 돌아간다.


어쩌다 건조한 날씨가 거듭되어 바닷바람조차 눅눅함을 걷어내고 바스락 소리가 날 것 같은 때가 있다. 그때는 산 정령도 말을 하려는 듯 투명한 대기 속에서 크게 한걸음 앞으로 다가온다. 그런 날엔 산머리의 모양과 계곡선들이 연필선처럼 뚜렷하다. 산 정상에서부터 바닷가 끝까지 길게 흘러내리는 능선. 산의 양쪽 능선은 흙내음 나는 할망의 넓은 치마 품처럼 완만히 펼쳐진다.


그러나 그런 날씨는 잠깐이요, 대개는 안개와 비가  떠돌면서 곳곳적셔낸다. 그렇게 내린 빗물은 산의 속살 깊이 스며든다. 물방울은 모든 화산암마다 머물러 이끼를 피워내고 초목을 키워내고 산을 의지한 생명들의 마른 목을 축여준다.


먼 바닷가로부터 사람들의 동네를 떠나 조금만 길을 걸어도 곧바로 검은 돌무더기와 푸른 잡목 군을 마주하게 된다. 또 이리저리 걷다 보면 군데군데 자리한 크고 작은 오름들이 나타나고 오름 자락 아래로는 손을 넣어보고 싶도록 맑은 내가 흘러간다. 작은 계곡물을 건너면 낯선 새 울음이 숲에 퍼지고 소슬바람에 나뭇잎들이 일제히 뒤집히며 은빛 얼굴찰랑거린다.


그 광경을 바라보면, 놓지 못하고 숲 속까지 끌고 들어온 일상의 번거로움이 선명히 드러난. 그리고 마치 금단의 땅에 무단침입이라도 한 듯 부끄러움이 가만히 생겨나서 걸음은 한없이 조심스러워진다.


그 길 위 어디에나 흩어져있는 검은 돌들은 햇빛조차 빨아들이며 태고의 빛깔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들이 반짝 생기를 띠는 순간은 산 할미가 섬 곳곳에 촉촉이 비를 뿌려줄 때다. 그러면 돌들은 생글거리는 얼굴로 참았던 모든 얘기를 큰 숲이 소란하도록 뱉어낸다. 큰 돌 사이에 숨은 작은 돌들도 수많은 숨구멍으로 오랜 시간 지내온 사연을 소곤거린다.

그때는 지나던 나그네가 만년의 세월을 겪은 화산암 앞에 자신의 단상 내려놓기 좋은 시간이다.


행인은 그 돌들을 딛고 한 마리 짐승처럼 좁은 길을 따라간다. 길의 좌우로는 낯선 식물과 날벌레가 수시로 등장하고 얕은 골짜기를 따라 투명한 계곡물이 햇살을 튕겨내며 흘러간다. 그렇게 물길을 따라가다 숲의 경계에 들어서면, 사람의 흔적은 끊기고 갑자기 운무가 훅 품에 안기며 몸으로 스며다.


산의 정령이 젖은 손으로 이야기한다!


사람의 소리가 아닌 숲의 소리로, 계곡의 소리로, 낮은 하늘의 소리로 말을 한다.

속에서도 간혹 산새들이 비의 장막을 뚫고 날아간다. 나뭇잎들은 굵은 빗방울에 후드덕이순식간에 덩치키운 골짜기 물은 몸을 비틀며 흘러 내려다.


숲은 비와 안개로 뒤덮여 있다. 육지 수목과 남방 아열대의 초목이 뒤섞인 숲은 신비롭다. 그리고 비 내리는 숲 속은 어둡고 미끄러워서 무섭기까지 하다. 숲은 여간해선 길은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걸을 수밖에 없다. 대체 이 길을 처음 간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나는 왜 이곳에 서 있는 것인가?


나그네는 맨발로 걸었을 그의 길 위에 문명의 덧신을 신고 지나간다. 땅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를 딛고 검은 화산토를 밟아 마침내 길 끝에 도달하면, 마법처럼 높은 숲은 사라지고 키 작은 관목만이 듬성듬성 자라는 대초원이 거짓말처럼 활짝 펼쳐진다. 산 할미가 호미로 산 전체를 빙 둘러 거대한 금줄을 그어놓은 듯 산림의 경계는 뚜렷하다. 가슴은 뻥 뚫린 듯 시원해지고 무릎께 높이의 관목만이 간간이 손을 뻗어 슬쩍 다리를 건드릴뿐이다.


고원 지대의 비바람은 온몸을 휘어 감으며 켜켜이 공중으로 날아간다. 발아래엔 검은 화산 흙 알갱이가 서걱거리고 물웅덩이가 좁은 길을 가로막는다. 아무래도 산 할미가 오라 하는 지점이 여기까지인 것 같다. 고개를 들어 안개비로 가려진 정상을 한동안 묵묵히 바라본다.

빗속의 한라산과 천년 주목의 땅에 선 나그네. 

둘만의 풍경이 거대한 부조처럼 공중에 새겨진다.




비 탓인지 호텔 밖 항구엔 비린내가 번져 있었다. 그렇게 어제부터 내린 비는 공항까지 따라오고 비행기 유리에도 점점이 달라붙었다.

이륙한 비행기가 좌우로 크게 한 번씩 동체를 기울이자 창 밖으로 운무 가득한 한라산이 살아있는 듯 오르내린다.


강렬한 냄새로 기억되는 비 오는 제주.

그곳은 바다 너머의 땅에서도

상처처럼 문득문득 통증을 유발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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