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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형 May 21. 2021

빗소리와 소년



목이 말라 일어났다가 답답해서
흰 플라스틱틀 창문을 열었다
갇혀있어 눅진했던 공기가 빠져나가고

찬바람이 아래로 밀려들었다
밖에서는 맑은 빗소리가 들려왔다
가끔씩 차량이 일으키는 물바퀴 소리가

커졌다간 사라졌다
밤 풍경은 내리는 비를 맞아 낮은 가슴으로

두런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오랫동안 잠자던 한 소년이 눈을 뜨고 일어나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대청마루에 누우면 소나기 소리가 살포시

잠을 재촉했다
백구는 젖은 털을 흔들어 대곤 마루 밑으로 들어가

두발 위에 턱을 괴었다
뒤뜰의 두 그루 사과나무와 오래된 포도덩굴도

기꺼이 굵은 빗줄기를 맞이했다


봄이면 아버지는 나무의 실한 녀석만 남기고

어린 과실을 솎아냈다
누이와 나는 짧은 생의 열매들을 주워 골라 씻었다

그리고 흰 설탕과 함께 넣고 조려서 윤기 어린

디저트를 만들었다


가을 어느 한날에 처녀 총각 볼처럼 어여쁘게 자란

사과를 따려고 굵은 가지를 붙잡고 나무에 올랐다
손 한 뼘 너머의 붉은 열매는 추락의 위험이 도사린

빛나는 유혹이었다
그렇게 수확한 몇 박스의 사과는 뒷마루에서

한겨울을 나면서 줄어들었다

추운 겨울날 사과를 한입 아삭 깨물면

새콤달콤한 즙이 터져나왔다


포도덩굴에서는 고사리 손보다 작은

파란색 송이가 생겨나 점점 자라났다

그리고 알이 커진 후엔 짙은 보라색으로 변해 갔다

한송이에서도 위치와 방향에 따라 변해가는

속도가 알마다 각기 달랐다

송이들은 알록달록한 색채를 띠며 익어 갔다

그 후 미술시간에 신사임당의 포도도를 보고

그녀의 섬세한 붓터치에 놀라고 말았다


신사임다의 포도화. 묵의 농담이 현란하다.

미처 제대로 송이를 이루지 못한 친구들은

수확이 끝나고도 종종 남겨져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방과 후에 나무에서 농익은 포도알을 따먹으려

손을 대면 신기하게도 알 표면에서 흰가루가 묻어났다



뒤뜰에는 고욤나무도 있었는데 다 자란 열매들이

대추알보다 작았다

그리고 수확해도 떫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늦가을에 고염 열매를 깨끗이 씻어 말려서 작은 항아리에 담아 익혔다

한참 후 열어보면 떫은맛은 사라지고

단곳감 같은 맛이 났다

그러나 씨앗이 커서 혀 안에서 발라먹기가

곤혹스러윘다

그래도 긴 겨울철 재미있는 천연간식의 추억으로

남기에 충분했다


채 따지않은 고염 열매는 낙엽 지고 서리가 내리면

쭈글쭈글 까맣게 변하면서 당도가 높아졌다

그러면 먹을 것이 부족해진 각종 새들이 수시로

날아들어 한입씩 쪼아댔다

그 시절 이후론 고욤나무도 침 담근 염도

좀처럼 구경할 수가 없었다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지고 시냇물이 불어나면

어린 친구들은 물 위에 고무신이나 종이배를

띄워 놓고 따라가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개천 멀리 앞산에는 어김없이 안개가

서리고 운무는 용머리 형상으로 꿈툴거리며

낮은 하늘가로 올라갔다






빗소리가 잦아들고 상념의 창이 닫히는 시간

사랑방 할아버지의 기침소리는 멀어지고

골목길 불빛 사이로 푸른 새벽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엎드린 돌 주변에 흰 꽃들이 피었다. 오월. 돌아가신 부모님 조부모님이 유독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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