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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형 May 15. 2021

봉은사-짧은 기행



11시 반에 집을 나서면서 빈 복숭아 통조림 통과 헛개수 캔을 그물망에 버렸다. 하늘을 보니 햇빛은 사라지고 구름은 짙은 회색으로 변했다. 오후에 비예보가 있었던 같다. 다시 들어가 검은 삼단 우산을 가방에 넣었다. 그래도 선글라스는 필요할 것 같았다. 자외선은 늘 존재한다니까 일단 챙겨본다. 어머니는 말년에 황반변성으로 시력을 잃는 고통을 겪으셨다. 생수통과 안경과 물티슈와 자질구레한 소품들이 든 플라스틱 백과 티셔츠 하나와 메모지와 볼펜과 시리얼 바가 든 가방의 부피는 좀처럼 줄일 수 없다. 말리지 않은 머리지만 바람이 살짝 불어서 모자를 꺼내어 썼다.


큰길을 피해 골목길을 통해 지하철역이 있는 사거리에 도착했다. 사방으로 에스컬레이터가 놓여있어 지상의 신호등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지하도로 진입하는 것이 빠르지만 오늘은 왠지 땅 아래로 내려가기 싫어졌다. 어떤 일로 작은 우울감이 생겼는데 그 때문일까, 어두운 지하보다는 신호등의 기다림을 선택하기로 했다. 두 번의 횡단보도를 지나 대각선 방향의 길로 들어서는 동안 굳은 표정의 사람을 마주쳤고 전동 킥보드를 탄 두 명의 남학생이 양쪽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주유소를 지나 테니스장을 품은 작은 공원길에 들어서자 바닥에 떨어진 아카시아 꽃잎들이 하얗게 번뜩였다. 도심에서도 꽃은 피고지건만 바라볼 여유가 넉넉지 않을 뿐이다. 언덕 위에 결혼식장이 있는 탓에 주말이면 단정히 옷을 갖춰 입은 선남선녀들이 근처를 삼삼오오 지나간다. 그네들의 청춘이 빛나 보이는 것은 날씨 탓일까 아니면 가라앉은 기분 탓일까?


조팝나무와 소나무 담장을 따라 걸으니 금방 봉은사 일주문에 닿았다. 봉은사의 전각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아담한 일주문은 옛 봉은사의 으로 넓었던 절터가 코엑스 전시장 등으로 개발되자 멀리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본래 자리가 아닌 큰 길가 바로 앞이고 규모도 사뭇 달라서 어색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옛절의 소나무 가득한 숲길 초입을 지켰을 사찰문이니 그 아래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서 있으면 솔바람이라도 스쳐 지나갈 것만 같다. 일주문의 새로 단장한 선명한 현판 글씨를 바라보니 쳐졌던 기분도 좀 나아지는 듯했다.


 올 것같은 흐린 날이지만 사월 초파일을 앞둔 터라 일주문 옆 코끼리 석상 옆에는 자비를 구하는 이들이 둘이나 맨바닥에 앉아 있었다.



절 초입에 지등으로 아기 부처와 룸비니 동산이 조성된 조형물 앞에서 한 가족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엄마인 듯 한 중년 여성이 핸드폰으로 젊은 커플을 찍었다. 갑자기 오지랖이 발동했다.

저, 제가 세 분을 함께 찍어드릴까요?

하지만 남자가 가볍게 거절했다.

네, 찍어주세요. 감사합니다~라는 답을 바라던 기대가 발아래로 떨어져 내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지으며 흠집난 감정을 추슬렀다.


부처님 오신 날 바로 전 주말이니 사람들이 꽤 많았다. 등을 신청하는 사람들. 등을 달려면 등의 위치와 크기에 따라 시주금이 다르므로 확인해야 한다. 물론 마음을 밝힌 심등이 최고이다. 그건 부처님과 나만 아는 등이니 가장 큰 비밀등이 기도하다.


등 구경은 야간이 최고인 듯~


종무소를 지나 대웅전 앞마당으로 올라서니 국악기 선율이 울려 퍼진다. 마당 오른쪽 전각인 선불당 마루에 봉은사 국악기 단원들이 정좌했고 창하는 아가씨 둘이서 고운 개량한 복을 입고 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아쉽게도 마지막 공연인 찬불가 순서란다. 젊은 단원들의 섬섬옥수가 악기에 얹히고 그 가락에 아름다운 목소리가 덧입혀져서 새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공연이 끝나 지장전으로 향하는 길에는 선불당 장지문들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이곳은 중앙에 작은 관세음보살상이 자리했는데 동쪽 벽 선반엔 스님들의 여섯 발우가 보자기에 덮인 채 놓여있다. 그리고 밖으로는 바로 아궁이 있는 부엌이 딸려 있어서 과거에 스님들이 이곳에서 공양을 했던 곳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전에는 쓸쓸히 굳게 잠겨있던 부엌이 얼마 전에 새롭게 단장하여 가끔씩 문이 열리고 쌓였던 장작으로 불을 지핀다. 그러면 굴뚝으로 연기가 올라와 하늘로 순조로이 오르기도 하고 마당으로 넓게 퍼져가기도 한다. 그때는 어릴 적 한옥의 아궁이불의 빛나는 표정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신발을 벗고 들어와 보니 한쪽 끝에 한 여인이 방석을 깔고 누워 있었다. 법당에 누운 광경은 처음 보았는데 인기척을 느꼈는지 나중에는 일어나 앉아 벽에 기대어 졸았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남이 보면 나 역시 법당에서 핸드폰이나 내리 보는 한심이일테니 말이다. 옛 스님들이 기거하던 곳이라 새로 방바닥도 기름을 먹인 한지로 깨끗하게 단장했다. 앉아있으니 노랗게 한지 장판에 배인 콩기름 내음이 고소하게 올라온다. 갑자기 마당이 소란스러워졌다. 밖을 내다보니 시원하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날이 가물어서 새순도 꽃잎도 생기가 덜했다. 오늘 비로 목마름이 해소되었으면 좋으련만. 대웅전에서 흘러나온 스님의 낭랑한 염불소리가 빗줄기 사이로 맑게 퍼져 나갔다.



관객은 많지 않으나 곳곳의 풀, 나무, 돌, 새들이 즐겨 듣고 날아다니니 진정한 음성공연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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