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독서 모임에서는 봄을 맞이해 한강 잔디밭에 앉아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는 작은 행사를 마련했다. 행사라고는 하지만 조금 이른 퇴근이 가능한 사람들끼리 한강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치킨, 피자를 시켜 먹으며 수다를 떨자는 거였다. 내가 책을 추천할 차례였기에 부랴부랴 알라딘을 뒤져보았다. 타사 튜더의 ‘나의 정원’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샛노란 장정의 표지에 비쩍 마른 노인이 식물을 굽어보는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봄맞이 한강 독서 모임에 푸르른 정원 이야기라니, 꽤 그럴듯해 보였다. 막상 책이 왔는데 굉장히 큰 판형에, 무거웠고, 글보다는 정원 사진집에 가까웠다. 독서 모임에 썩 들어맞는 책이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어차피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 있는 회원들은 책보다는 수다에 매진했다. 어찌 됐든 책에 대한 감상을 한 마디씩은 말해야 했는데 나는 별 감상이 없었기도 하거니와 책이 영 별로라 책에 대한 감상보다는 내 얘기를 늘어놨다.
입사하고 4, 5년이 지난 어느 날인가, 사무실 책상 위에 흙이 담긴 화분이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 그 화분을 발견했을 때, 이게 무슨 물건인가 한참을 생각했다. ‘왜 흙이 담긴 화분이 여기 놓여 있는 거지?’ 하고 의아한 생각만 들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화분에 왜 식물은 없고 흙만 있는 건지. 잠깐이지만 미궁에 빠져있다가 서서히 흐릿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입사했을 때 부장이 자기 자리에 있던 화분 하나를 줬(던 것 같)다. 아마 처음 한두 번은 물을 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두 번이 전부였을 것이다. 식물이 언제 죽어 흙 속에서 썩어갔는지도 모를뿐더러, 어느 순간 화분이 거기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이다. 인간의 감각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책을 읽거나 실험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라는 인간이 관심 없는 대상에 얼마나 무관심한지 알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식물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음은 물론이다.
올봄 어느 날인가,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베란다를 보고 있다가 푸른 이파리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싱그러운 느낌이었다. 한두 개가 아니고 종류가 다른 화분들이 층층이 놓여 있었다. 그것들 각자가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듯 다른 모양으로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베란다에만 있는 게 아니다. TV 옆에도 커다란 화분이 있고 거기에는 신선들이 부채로 쓸 것 같은 넓적한 잎들이 힘차게 기지개를 켜고 있다. 안방 밖으로는 왕자행거에 걸어놓은 러브체인 이파리들이 하늘하늘 바람을 맞는다. 그냥 보면 살아 있긴 한 건지 모르겠는 이 러브체인이란 녀석들은, 그러나 언제 봐도 그 모양 그대로 하늘거리고 있는 걸 보면 원체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들인가 싶다. 최근에는 작은 동물 피규어들로 꾸며진 테라리움이 몇 개 생겨, 유리병 속에 습기 마를 날이 없다.
부엌 전자레인지장 위에는 작은 어항에 그보다 더 작은 구피 다섯 마리가 헤엄치고 있다. 이 구피들은 아내가 처음으로 얻어왔던 구피 세 마리 중 혼자 살아남은 암컷 한 마리와 그 후에 얻어온 활달했던 수컷 한 마리가 교미해서 낳은 새끼들이다. 아내는 구피들의 꼬리 색깔에 맞춰 암컷은 옐로우, 수컷은 비단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두 번의 산란으로 에너지를 소진한 암컷이 먼저 떠나고, 얼마 후 수컷도 기력을 잃고 스러졌다. 다섯 마리 가운데 세 마리는 첫 번째 낳았던 열여섯 마리 가운데 남은 것들이고 나머지 두 마리는 두 번째 낳았던 열 마리 가운데 살아남은 것들이다.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죽은 새끼들도 몇 되고, 아내의 친구들에게 억지로 분양시킨 새끼들도 꽤 된다. 아내는 매일 물을 갈아주고 하루에 두 번 먹이를 준다. 내가 먹이 주는 것을 싫어하는데, 너무 많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안 먹으면 어떻게 사나 싶을 만큼 양이 적어 보이는데 아내는 이 문제에 대해 엄격하다. 언젠가부터 나는 아내가 허락할 때만 먹이를 줄 수 있게 됐다.
베란다의 식물들을 보며 싱그러움을 느꼈던 날, 나는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어항 앞에 가서 꼬물거리는 구피들을 보다가 깨달았다. 내 주위에 생명이 넘쳐나고 있구나! 살아있는 것들로 둘러싸여 있구나!
아내를 만나기 전 혼자 살던 집에는 나를 제외한 어떤 생명의 자취도 없었다. 식물이나 동물은커녕 하다못해 냉동실 안에 얼린 생선도 없었다. 가구나 가전은 전부 회색 아니면 검은색. 옷은 회색 아니면 검은색 아니면 흰색. 입는 옷이나 예쁜 인테리어가 ‘나’라는 존재를 대변할 수 없다는 시니컬함으로 무장하고 살다 보니 무채색이 편했다. 돈 주고 산 물건이 한 인간의 개성에 관계할 수는 없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살았다. 개똥철학은 확고했지만 삶의 반경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혼자 엄숙하고 진지한, 무채색이었다.
그런 삶 속으로 아내가 들어오면서 색깔이 입혀졌다. 이 말은 비유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나는 아내가 사 주는 '색'이 들어간 옷을 입게 됐으므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기도 하다. 아내는 내 생일에 지금 TV 옆에 놓여 있는 커다란 화분을 당시 살던 집으로 보내줬다. 식물이 내뿜는 산소를 처음으로 마시게 된 게 바로 그날이다. 아내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일주일에 하루 정도만 물을 주면 되는 종류라고 알려주었다. 사무실 책상에 흙만 남았던 화분의 예를 들어주었다. 처음 한 번 물을 준 이후로 나는 그 화분에 물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그 화분은 4년째 윤기 흐르는 이파리를 우아하게 펼치고 있다. 그러고 보니, 타 부서 직원으로 서로 말 섞을 일도 없던 아내와 동네 친구가 된 후에 박스로 산 귤을 몇 개 나눠주자, 아내에게 답례로 받았던 물건도 꽃바구니였다. 아내는 그 바구니를 회사에서 줬는데, 꽃바구니를 들고 내 자리로 돌아오는 내내 누가 보면 어쩌나 가슴이 쿵쾅거렸다. 꽃을 손에 드는 것 자체도 어려운 일인데 사무실에서 꽃을 들고 있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꽃을 손에 들고 있기가 쑥스럽다는 그 감각을 아직도 아내에게 이해시키지 못했고, 아마 평생 그러리라. 우리 부모님 집에 처음으로 인사하러 가기 전날, 아내는 새벽같이 양재 꽃시장에 나가서 몇 종류의 꽃을 사 왔다. 예비 며느리가 직접 만든 꽃다발을 들고 웃고 있는 엄마의 사진을 가끔 본다. 그러면 가슴이 찡하고 울린다.
그리하여 한강에서 타사 튜더의 정원 이야기를 읽고, 생명이라곤 나 하나밖에 없던 삶이 몇 년 만에 생명으로 가득 둘러싸인 삶이 되었다는 내 얘기를 회원들에게 주절거리게 된 거다. 녹음이 짙은 잔디밭에 앉아, 수백 평의 정원을 가꾼 이야기를 읽고, 사람들 각자의 자연 사랑을 들으며, 내 안에 뭔가가 꿈틀대는 걸 느끼면서 말이다. 그 느낌은 아마도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나 자신의 생명력이 뒤엉키는 감각이었던 것 같다.
이제 삼십 대에 진입하며 결혼과 연애를 고민하는 회원들에게 아주 확고한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결혼을 꼭 하시라고. 하다못해 동거라도 하시라고. 혼자 살지 마시라고. 나 같은 무채색 인간을 생명이 약동하는 푸른빛으로 물들이는 게 결혼이라고.(이런 말을 어찌 입에 담을 수 있나. 이런 뉘앙스의 말을 했다는 얘기다.)
베란다에는 숲의 실루엣이 하늘거리는 커튼이 쳐져 있고, 거실에는 들꽃들이 아름답게 피어있는 러그가 깔려있다. 우리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게 될 것이다. 살아있는 것들로부터 에너지를 받는 아내의 강인한 생명력이 집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흐른다. 알록달록한 색깔을 입고 나는, 나도 물들 수 있는 인간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색을 먹어 없애버리는 무채색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