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글로벌인재 되기
미국, 스위스, 싱가포르에서 글로벌 마케팅, Product Director를, 한국에서 아시아 영업 총괄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배운 글로벌 인재가 되는 방법을 적을 예정입니다.
1997년 졸업 후 대학원에 들어갔다. 결심한 어학연수를 가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낮에는 대학원, 밤에는 약국 아르바이트를 했고, 7월에는 휴학 후 풀타임으로 약국 근무를 시작했다. 98년 1월 미국 산타바바라로 출국 예정이었다. 6개월 연수 계획으로.
열심히 돈을 모으고, 영어학원도 다녔는데, 그 해 11월부터 환율이 심상치 않았다. 당시의 나는 환율이 뭔지, 돌아가는 경제상황은 더더욱 몰랐다. 학원에 한국은행 다니시는 분이 계셔서 어떻게 될지 물으니, ‘지금이 이상한 거다. 금방 원상 복귀될 거다’라고 하셨다. 그 말을 믿은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이제 환전을 해야 하는데 6개월 연수에 필요했던 돈은 정확히 반토막 나 있었다. 같은 돈으로 3개월밖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미국에 있어야 했던 98년 1월 나는 집에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보다 더 큰 건 억울함이었다. 인생 처음으로 진짜 하고 싶은 걸 하려 하는데 세상이 나를 막다니. 또 깨달았다. 세상엔 내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것들이 많구나. IMF를 훨씬 힘들게 겪은 많은 분들이 계시겠지만, 그때, 25살의 나는 그런 상황이 한없이 억울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방에만 있는 내가 걱정되신 어머니는 눈치만 보셨다. 가끔 조심스럽게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셨다. 나도 몰랐다. 어떻게 할지. 그렇게 한 달을 보내고, 2월 어느 날, 선택했다. 연수를 가기로. ‘그래, 3개월을 6개월처럼 다녀오자.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하자.’ 그때의 마음은 그랬다. 이런 마음과 준비의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연수를 가지 않고 회사든 약국이든 간 후 미국으로 다시 가긴 힘들 거라고.
1998년 2월 내 선택은, 물러나지 않고 전진하는 것이었다. 1998년 4월 나는 산타바바라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연수생 중에 한국인은 나를 포함 총 세 명이었다. 억울한 마음은 같았기에 우리는 만나도 영어만 쓰기로 결정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저들도 외국인이다 라는 생각으로 생활했다. 돌아보니 행복한 시간이었다. 여러 나라의 친구들도 만나고, 해변에 가서 놀기도 했다. 무엇보다 친절한 홈스테이 호스트를 만나서 박찬호를 보여준다고 LA 다저스 경기도 보여줬다. 주인집 빨간 머리 7살 맥스에게 자전거도 배웠다. 맥스가 너무 좋아 한동안 내 이상형은 빨간 머리 외국인이었다.
3개월은 금방 갔다. 아쉬운 마음에 남은 돈으로 서부 여행을 한 달 더 했다. 혼자 하는 여행이기에 여러 번 무서웠지만, 내가 대견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3개월의 경험으로 얻은 건 영어실력이 아니었다.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연수 후 산호세를 여행할 때 버거 집에서 점원이 계속 "Pardon?"이라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내 발음이 이상한가 주눅 들었겠지만, 그때는 왠지 모를 자신감에 "Do you want me to write? I can do that."이라고 했다. 별거 아니구나, 못 알아들으면 다시 말하면 되고, 그것도 안 되면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4개월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마중 나오신 부모님은 나를 못 알아보셨다. '엄마' 하니까 화들짝 놀라시더니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한참 후 '떨어져서 걸어라'라고 하셨다. 4개월 동안 10kg가 찐 걸 난 몰랐다. 미국에서 체중을 잰 적도 없고, 미국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내가 늘 작아 보였기에. 반가운 마음보다 창피한 마음이 크셨던 어머니와 거리를 두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4개월에 찐 10kg는 2년이 지나서야 겨우 빠졌다.
생각해 보니 미국 생활 동안 나는 영어에 대한 자신감과 늘어난 10kg의 체중을 얻었다. 남은 게 더 있었구나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