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아이에겐 밖에서 노는 게 공부와 다름없다는 육아서에 큰 감명을 받은 엄마가 있었다. 마침 마음이 아픈 중학생들을 많이 보던 차였다. 밖에서 뛰어놀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 마음이 건강한 중학생이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애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어린이답게 노는 시간을 많이 가지게 해 주자고. 그러다 중학생이 되면서 조금씩 공부에 뜻을 품기 시작해 고등학생 땐 마지막 박차를 가하는 아이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희망까지 품었다. 어릴 땐 실컷 잘 놀다가 좀 커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길 바라는, 이 욕심 많은 엄마가 바로 나였다.
그의 딸은 엄마의 계획대로(?) 밖에서 신나게 노는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중학생이 되었다. 엄마의 바람대로라면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공부에 뜻을 품기 시작해야 했다. 공부에 뜻을 품은 중학생이라. 전국적으로 몇 명이나 될까. 희소한 그 숫자에 우리 애가 들어가길 희망했다니 내 꿈이 너무 컸구나 한탄하는 엄마에게 딸은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기말고사 기간조차 제대로 공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제야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학원가는 엄마의 불안을 먹고 산다더니, 불안한 마음이 휘몰아치자 이런저런 학원을 알아보기에 이르렀다. 이 학원도 좋아 보이고, 저 학원도 필요할 것 같고... 보내고 싶은 학원을 추려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애는 아무 생각이 없는데 나만 이러는 게 무슨 소용이람.
아이의 최근 행보를 생각하면 할수록 잔소리로 분류될 말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의 시간이 쌓여 미래의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듯 보내는 시간들. 그렇게 흘려보내는 시간이 안타깝다는 이유로 애를 학원에 집어넣어(?) 버린다면 장소만 바뀔 뿐 애는 또 시간을 흘려보내게 되겠지.
아이를 일깨우는 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우리의 시시껄렁한 농담이 오고 가는 식탁 앞이 아니라 새로운 장소에서 나눈다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배를 만들게 하려면 바다를 동경하게 하라는 생텍쥐페리의 말처럼 공부를 하게 하려면 그 공부를 날게 삼아 훨훨 날아다닐 이 세상의 면면을 보여주는 것도 필요하니까.
그래서 부산행 기차표를 끊었다. 학원 알아보다가 지친 엄마가 바닷바람을 쐬러 가고 싶었던 게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이 있을 수도 있겠다. 찔리는 바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나에겐 둘러댈 이유가 있다. 앞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 '둘러댈 이유'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읽기를 멈출 생각일랑 하지 마시고 계속해서 다음 글을 읽어보시길 바란다. 끝까지 읽고 나면 아이를 데리고 우리가 다녀왔던 곳을 그대로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동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