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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Apr 19. 2022

파파야, 바나나, 구아바에 담긴 나의 인생

한국은 모든 것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계절인데, 이곳 호주는 모든 것이 무르익어가는 계절이다. 깊어진 나뭇잎들의 색과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공기는 가을이 무르익어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과일가게 매대에는 감과 밤, 대추가 올려져 있고, 감농장에 다녀온 친구는 내 주먹만 한 감들이 가득한 상자 하나를 갖다 줬다. 이스터 연휴와 2주 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 길에 올라선 차들은 조금은 여유 있는 모습으로 신호등 앞에 서 있다. 깊어진 가을만큼 모두가 넉넉한 마음이 된 것 같다.


가을 오후, 난 호숫가를 걸어본다. 햇살이 따가운 만큼 모든 과일이 잘 익어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따가운 햇살마저 반갑다. 오늘도 어김없이 인심 좋은 어느 이웃이 집에서 수확한 바나나며 파파야를 가져가라고 돌담에 올려 두었다. 호수를 걷는 사람들만의 특권이다. 예정된 것도 아니라 담아갈 가방도 없지만, 욕심부리지 않고 두 손에 담을 만큼만 각자 가져간다. 다들 손에 바나나와 파파야를 들고 호수를 걷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정겹기도 하다. 그렇게 내가 가져온 것은 파파야 하나, 바나나 한 송이, 구아바 두 개다. 구아바는 작아서 주머니에 넣어 왔다.


아직 모든 것이 파랗다. 바나나도 파랗고, 파파야도 파랗고, 구아바도 파랗다. 이렇게 새파란 과일들이 과연 익을까 의심스럽긴 했지만 하루하루 달라지는 가을 공기를 믿고 부엌 한켠에 놓아두었다.

나흘이 지나자 가장 먼저 익은 건 구아바였다. 파랗기만 하던 구아바가 노랗게 변하고, 구아바향이 온 부엌에 가득했다. 바나나는 한 두 개가 옅은 노란빛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파파야는 꿈쩍도 않고 파랗기만 하다.


 


구아바는 다 익어 잘라보니 안이 선홍색이다. 구아바 주스는 먹어봤어도 진짜 구아바는 처음이다. 단단하고 작은 씨들이 많아 먹기가 불편하지만, 과육은 부드럽고 달았다. 노란빛으로 변한 바나나 하나를 따 먹어보니 새콤달콤한 바나나맛이다. 레이디 핑거라고 불리는 바나나라 새콤한 맛이 돈다. 몰랑몰랑 잘 익어 너무 맛있다. 바나나 한 개를 네 식구가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파파야는 아직 익지 않아 익을 때까지 기다리려 했는데, 호기심 많은 둘째 녀석이 파파야를 잘라버렸다. 겉과는 달리 안은 붉은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씹어보니 제법 단 맛이 돈다. 하지만 과육이 너무 단단해 과일로 먹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자른 김에 파파야 김치를 담았다. 작게 썰어 액젓과 고춧가루, 파, 마늘을 넣고 무치니 뚝딱 파파야 김치가 되었다. 설탕으로 맛을 내지 않고, 본연의 단맛이 나는 파파야 김치가 너무 맛있다.


 




과일들을 졸졸히 놓고 보니, 파파야는 20대, 바나나는 40대, 구아바는 노년에 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덜 익은 파파야 같은 나의 20대 시절, 반쯤 익은 바나나 같은 지금의 내 나이, 구아바처럼 향을 가득 품고 온전히 익은, 내가 맞이하게 될 노년.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시절이 없다. 각자의 나이에 맞는 맛을 내고, 색을 품는다. 20대엔 겉보기는 싱그럽지만, 안으로는 많은 갈등을 하며 익어갈 준비를 열심히 한다. 40대엔 인생의 경험치가 쌓여 그래도 한층 성숙된 맛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노년기엔 나의 가장 아름다운 맛과 색과 향이 오롯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주름이 늘고 늙어가는 것이 아니다. 나를 더 찾고, 나를 더 성숙시키고, 나의 아름다운 결정체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을 향으로든 색으로든 보여준 과일들처럼 사람도 인품으로, 인품이 녹아있는 자태로 보여준다. 익어가는 과일들이 억지로 다시 녹색을 입지 않는 것처럼, 늘어나는 주름을 억지로 가리려 할 필요가 없다. 그저 내 안이 내 향과 내 맛으로 가득 차 잘 익어가고 있는가를 돌보는 일이 필요할 뿐이다.


과일들이 익어가는 계절에, 나도 같이 익어가길 바랄 뿐이다.


오늘의 희열 카드-- 파파야, 바나나, 구아바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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