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시카(아워 미디어 회장)는 1998년 인터넷 잡지 '살롱'에서 “우리의 과거는 우리 디지털 피부에 문신처럼 아로새겨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말처럼 디지털 시대로 들어서며 삶과 사회의 대부분이 인터넷에 기록되고 기억되는 세상이 됐다.1)
우리의 모든 삶이 인터넷에 기록된다. 스스로 기록하기도 하고,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기도 한다. 좋든, 싫든, 좋은 기억이든, 부끄러운 치부든, 당사자의 자유 의지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든 것이 인터넷 어딘가에 나의 삶이 새겨진다. 감추고 싶은 과거, 안 좋은 기억, 심지어 잘못된 정보라도 인터넷에 한번 기록이 남겨지게 되면, 영원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누구나 지우고 싶은 과거의 흔적이 있다. 그 흔적이 스스로에 의한 것이거나, 범죄의 피해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는 정보 주체가 온라인상 자신과 관련된 모든 정보에 대한 삭제 및 확산 방지를 요구할 수 있는 자기 결정권 및 통제 권리를 뜻한다. 잊힐 권리에 대한 논란은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행동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몇몇 개인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2)
쉽게 말해 앞으로의 더 나은 삶을 위해 과거의 기억을 사람들이 잊게끔 하는 권리이다. 인격권인 것이다. 우리나라도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정보의 삭제를 인터넷 사업자에게 요구할 수 있게 법적으로 보장돼 있다. 하지만 셀 수 없이 많은 플랫폼들과 소셜 네트워크, 제3자의 개인 저장공간 등 어느 곳에든 남아있는 흔적을 추적해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참으로 지극히 어렵다.
나에게 잊혀질 권리는 없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굳이 잊히려 시도하지도 않는다. 나의 아픈 과거는 끊임없이 다른 이들에 의해 자가발전하고, 확대 재생산돼 왔다. 각종 프로그램에서도 패러디의 단골 소스로 종종 활용된다. 조롱과 유머의 경계를 넘나 들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하나의 문화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위 밈이 됐던, 코미디 소재가 됐던 소스로 이용되는 것에 나 자신을 기꺼이 내어 줄 수 있다. 다양한 표현의 자유를 나는 인정한다.
무한도전과 개그콘서트의 패러디 (출처 : KBS, MBC)
2016년 3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AI와 인간의 대결이 펼쳐졌다.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국이었다. 대결은 허무하게도 알파고의 승리로 쉽게 결론이 났다. 그런데,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게 내리 3연패를 당하자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여지없이 내가 소환됐다.
'이쯤 되면 알파고를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1인'
알파고의 전원을 차단하는 것만이 인간이 유일하게 이기는 방법이라는 거다. 이 기가 막힌 패러디는 결국, 이게 뭐라고 기사화까지 되고야 말았다. 하긴, 나 역시 상상조차도 하지 못한 기발한 생각이었다.
2년 뒤인 2018년. 나는 북한을 가게 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핵실험 시설인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쇄하겠다고 전 세계에 발표했다. 미국 CNN과 중국 CCTV, 러시아, 영국 등 전 세계 주요 국가 기자단이 초청됐고, 우리나라에서는 MBC와 뉴스1이 대표 취재단으로 가게 됐다. 당시 나는 통일외교부 소속 국방부 출입 기자였는데 내가 가게 됐다. 기자로서 정말이지 평생 있을까 말까 한 영광스럽고 좋은 기회였다.
가는 길은 험난했다. 다른 국제 기자단과는 달리 북한이 대한민국 취재진에게는 갑자기 방문을 불허했다. 급작스럽게 경색된 남북관계 때문이었다. 우리는 일단 국제 기자단이 북한 원산으로 출발하는 베이징으로 향했다. 혹시나 북한이 마음을 변경할 가능성에 대비해 공항에서 대기하기 위해서였다. 역사의 목격자가 되느냐 마느냐 중요한 갈림길에서 마음을 졸이던 그때.
국내에서는 또다시 내가 소환됐다.
출처 : 스마트인컴
핵실험장 전원을 끄러 가냐는 거였다. 잊혀질만하면 '그때의 나'는 여지없이 소환된다.
나에게 잊혀질 권리는 없지만,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인격권이 있다.
'제대로 알릴 권리'이다. 물론 정식 용어는 아니다. 내가 지어낸 용어다. 잊혀질 권리가 없다면 제대로라도 알릴 권리는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다시 제대로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권리인 것이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모든 사람이 등을 돌릴 때, 그래서 아무런 시도 조차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럴 때 잘못 알려진 사실들이라도 바로잡을 용기가 부여되고 기회가 주어지는 권리. 한 사람의 최소한의 인격을 위한 것이다.
인터넷 세상에는 나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이 너무나 많다. 잘못된 정보는 편견과 악감정을 낳고 또 다른 잘못된 정보를 생산해 낸다. 악플 중에는 악의적으로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내 유포하는 댓글까지 종종 있다. 그러한 악플은 악플을 재생산해 낸다. 그러나 나는 대응할 수가 없다. 그 악플이 잘못된 사실이라며 댓글을 달수도 없고, 형사적 조치를 취할 수도 없다. 내가 대응하는 순간 파장이 다시 일파만파 퍼질 것이고, 득달같이 기사도 뜰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이 아니다. 공인이고, 조직에 속한 구성원이다. 그래서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다.
검색 엔진도 잘못된 정보 투성이다. 나무 위키의 경우 내가 언론사를 고소하고, 다른 기사에서도 조작 기사를 쓰는 기자로 설명이 돼 있다. 심지어 과거 언제인가는 성추행 기자로 묘사도 돼 있었다. 나무 위키는 불특정 다수의 여러 사람이 개입해 정보를 넣는 집단 편집 시스템이다 보니 검증 안된 잘못된 정보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사람들은 소위 정론 같이 정리된 백과사전 같은 사이트에서 그렇게 설명을 하니 사실로 믿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나무 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다.
유튜브에는 소위 '사이버 렉카'(표준어로는 '렉커'가 맞는 표현법이다. 하지만 고유명사처럼 사용되는 신종 용어라 맞춤법에는 틀리지만 그대로 사용하려 한다)라 불리는 유튜버들이 있다. 사회 다양한 분야에서 이슈가 된 각종 가십성 사건사고들을 짜깁기해 콘텐츠를 만드는 유튜버를 일컫는다. 논란이 생긴 이슈에 득달 같이 달려들어 자극적인 말들과 해석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아 조회수를 올려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이다. 마치 교통사고 현장의 렉카차 처럼 사고만 나면 사이버상에서 부리나케 달려오기 때문에 사이버 렉카라 불린다.
문제는 그들이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최대한 자극적인 말과 비하를 서슴지 않고, 헛소문을 사실인 것처럼 설명해 사람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사이버 렉카들은 이름과 얼굴은 드러내지 않고 유튜버 닉네임의 익명에 숨어 마치 전문가인 마냥 타깃을 공격한다.
연예계나 유명인들의 이슈에 대해 자극적인 콘텐츠를 만들어 돈벌이를 한다 (출처: 유튜브)
대리기자 사과 영상과 함께 논란이 일자 나 또한 사이버 렉카들이 달려들어 공격했다. 그 콘텐츠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악감정을 더 부추겼고, 악플의 악플을 재생산해 냈다. 이 또한 내가 직접적으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나를 공격한 한 사이버 렉카는 가짜 사나이 출연진을 공격하는 콘텐츠를 만들었다가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며 다른 사이버 렉카의 공격을 받았다. 물어 뜯고 물어 뜯기는 참으로 기가 막힌 인터넷 세상이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제대로 알릴 권리'를 하나도 실현하지 못했다.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시도조차 생각지 못했다. 그냥 참고 침묵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지금 제대로 알릴 권리를 이 글에서 실현하고 있다. 이 책에서 나의 인격권을 되찾았다.
주홍글씨는 지우지 못하더라도 잘못 새겨진 주홍글씨는 바로 새겨야 하지 않을까..
1) [네이버 지식백과] 잊혀질 권리 - 인터넷에서 나를 잊어주세요 (용어로 보는 IT, 권혜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