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충환 Nov 01. 2020

08. '어그로' 끌려다 '어그러' 졌다

[참고] aggro (어그로) : 인터넷에서 관심을 끌기 위한 자극적인 글과 행동.



 기자생활 15년 만에 TV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유튜브라는 신세계로 들어갔다. TV에서 벗어나 새로운 플랫폼에서 다양한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회사도 전략적인 차원에서 보도를 떠나 유튜브의 세계에서 뛰어 놀 것을 허락했다.

 디지털뉴스제작팀으로 인사발령이 났다. 다만 내 개인 채널이 아닌 '엠빅 뉴스'라는 회사 유튜브 채널에서 유튜브용 기사 아이템 제작과 개인 코너를 맞게 됐다. 15년 간 TV 뉴스만 만들어 오던 내가 소위 '유튜브 갬성'을 따라갈 수 있을까?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저널리즘을 버려라


 해당 부서로 발령을 받자마자 선배로부터 처음 들은 말이다. 그만큼 유튜브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지금까지 체화돼 있던 저널리즘의 관념을 버려야 했다. 이쪽 세계는 '조회수가 깡패'다. TV 시절에서도 시청률의 노예로 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건만, 조회수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어떻게 하면 조회수를 1 더 올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구독자를 한 명이라도 늘릴까 가 지상 최대 과제다. 공익보다는 재미와 흥미.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관심을 끌만한 이슈와 소재를 갈구했다.

 그런 면에서 어떻게 보면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내가 유리한 것 같았다.

 그래서 작정하고 나를 팔기로 했다.


'대리 기자' 티저 영상 (출처 : 엠빅뉴스)


 'PC방 전원 차단 기자의 귀환'


 이 얼마나 섹시한 어그로인가. 사람들이 욕할게 눈에 선했다. 그러나 '욕하면 어때? 일단 시작부터 관심 끌고 보자'라는 심리가 더 강했다. 더욱이 9년 전 사건이다. 이제는 유머 코드로 웃어넘길 때가 되지 않았을까?

 마침 유튜브에는 어느 유튜버가 PC방 전원 차단 사건을 메인으로 방송사고 모음 영상을 올렸고, 조회수가 무려 6백만 회를 기록하고 있었다.

 '됐다. 흐름을 타자. 나는 밈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착각 속에 성공을 꿈꿨다. 성공할 것 같았다. 처음에야 '저 똘아이 왜 또 뭐 하는 거야?' 라면서 욕하더라도 콘텐츠로 승부하면 마음을 돌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커다란 오판이었다.  


 어그로 끌려다가 완전히 어그러져 버렸다.  




 PC방 전원 차단이 실험이었던 만큼, 새로운 콘텐츠는 실험과 체험형 유튜브에 초점을 맞췄다. 기존 유튜버 가운데 실험형, 체험형 콘텐츠는 차고 넘쳤다. 하지만 그들과 견줘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말초적인 호기심을 해소해준다던가, 예능형 체험이 아닌, 보다 전문적인 실험과 체험을 하고자 했다. 나는 가능했다. 왜냐 하면 MBC란 거대한 미디어가 뒷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알려드림' 진용진 보다 전문적이면서, '허팝' 보다는 사회적 실험을 추구하고, '워크맨' 장성규 같은 예능형이 아닌 다큐형 체험을 하려 했다. 사실, 통하리라는 나의 믿음과 근거 없는 자신감에는 유튜브에 존재하는 기존 콘텐츠들에 대한 '깔봄'이 저변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왜? 나는 그들보다 더 전문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레거시 미디어'요, 그들은 '고작 유튜버'라는 인식이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완벽한 교만이자, 오만과 착각의 결정체였다. 그러한 생각과 무의식들이 결국 내 목을 졸랐다.


 그들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민, 노력을 들여다보는 혜안이 나에게 없었다.

 오로지 맹목적인 자신감이 내 눈을 멀게 했다.     


'대리 기자' 티저 영상 (출처 : 엠빅뉴스)


 코너 제목은 '대리 기자'로 정해졌다. '대신 취재해 드립니다' 사람들이 궁금한 것을 기자적 시각으로 전문 기관과 속 시원히 해결해 주겠다는 취지였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관건은 세일즈였다. 시끌벅적하게 내 코너의 시작을 알려야 했다. 그래서 티저 영상을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9년 전 사건에 대한 '사과'였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작할 수는 없었다. 어떠한 방식이 됐던 사과를 한 뒤에 시작을 하는 게 맞았다. 다만 사과의 방식과 시기가 관건이었다.

 

 가볍지만 진정성 있게 할 것인가, 소위 유튜브 갬성에 맞춰서 과하게 무릎 꿇고 오버해서 '잘못했습니다' 용서를 빌 것인가, 아니면 왜 굳이 사과를 하느냐. 뭘 그리 잘못했느냐. 논란이 있었지만 9년 전 일이고 그것이 과연 사과까지 할 만한 일인 것인가. 여러 의견이 엇갈렸다. 결국 최종적으로 굳이 사과로 시작하지는 않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9년 만에 나타나서 무턱대고 사과부터 하는 것도 꼴이 이상하다는 거였다. 일단 시작을 하고 사과를 해도 늦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과부터 원했다. 내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 보다, 과거 행위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기를 더 원했다. 재미있고 알찬 수많은 유튜브 콘텐츠들이 쏟아지고 있는 마당에, 내가 보여주려는 이야기에 대해 사람들이 기대감을 바로 갖기란 만무했다. 전형적인 콘텐츠 공급자 위주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완성된 티저는 화려했다. '레전드 오브 레전드' 같은 수식어들과 과거 인기를 끌었던 나의 실험 장면들로 메워졌다. 질 좋고 재미있는 콘텐츠로 찾아갈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댓글 창에는 응원과 관심보단 욕설로 가득 채워졌다.


'대리 기자' 영상에 달린 악플 중 하나


 '1일 1깡'


 '대리 기자'가 론칭될 당시, 가수 비의 노래 '깡' 뮤직비디오가 큰 화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처참하게 공격받던 깡이 다시 사람들에게 회자되면서 인기를 얻어가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 깡 뮤직비디오를 본다는 '1일 1 깡'의 문화가 만들어진 그 바탕에는 비의 '쿨한 인정'이 작용했다.

 나도 쿨해지고 싶었다. 쿨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멋있게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의 진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그로 끈 첫 단추가 어그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삶은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결국, 애써 만든 티저 영상을 내렸다.    


 눈물이 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