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이 흘렀지만 만나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해당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문제점에 대해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는 이들, 공감하는 이들도 있었고, 박장대소 웃는 이들도 있었다. 좋아해야 하는 건지, 좋지 않은 건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적어도 사람들이 기억을 하는 기자가 됐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기억하잖아. 대한민국 수천 명의 기자들 중에 기억되는 기자잖아'
'남들은 일부러 노이즈 마케팅도 하는데. 나만의 무기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냐?'
'그 기자가 누구인지 어떤 기사를 썼는지도 모르는 수많은 기자들보다 나은 거 아냐?'
라는 자위를 하고 있었다.
대단한 착각이었다.
궁지에 몰리니까 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논리를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다. 본분을 잊어버렸다. 나는 유명해 지기 위해서 기자가 된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기억되기 위해서 기자가 된 것이 아니다. TV 화면에서 폼나게 얼굴을 내밀기 위해서 기자가 된 것이 아니다. 위험했다. 나를 팔아 장사하려는 얄팍한 생각이었다.
사람들이 몰라도 조용히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사의 힘. 누군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불합리한 사회를 시나브로 바꿔 나가는 저널리즘의 힘. 그 의미와 내 신념을 잠시 망각했다. 나는 마치 셀럽이라도 된 양 오만을 떨었다. 이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다녔다.
부끄럽다.
9년이 지나서야 나는 사람들이 표출하는 분노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다.
우연한 술자리였다. 아니 나를 위한 술자리였다. 친한 과거 출입처 사람들과 함께했다. 새로 맡게 된 코너에 대한 고민과 악플로 상처 받은 내 영혼을 술과 이야기로 달래주는 자리였다. 나와 동갑인 그 출입처 친구는 후배 한 명을 데리고 나왔다. 나를 보고 싶어 했단다. 심지어 나를 좋아했단다. 동생이었다. 쾌활하고 명석한 친구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게임 마니아였다. 반가웠다.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그에게서 뜻밖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바로 그들, 게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형님, 왜 사람들이 그토록 분노하는지 정말 모르셨어요? 형님은 그 사람들의 자아실현을 짓밟은 거예요'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아.. 내가 그동안 얼마나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단순히 컴퓨터 게임의 전원을 끈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누군가가 열중하고 있는 취미 생활을 방해한 것이 아니었다. 게임을 도중에 중단한 것에 대한 페널티와 잃어버린 게임 시간에 대해 단순한 피해를 준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 바로 '자아'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현실의 '나'가 아닌, 게임이라는 현실 속에서 또 다른 '나, 자아'를 실현 중이었다. 레벨이 올라가고, 등급이 올라가면서 커다란 성취를 이룬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렇게 자아를 소중하게 실현시켜간다. 어쩌면 현실의 자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그 사람이 자아실현을 해나가는 과정과 기회를 내가 강제적으로 박탈한 것이었다. 물론 그날 PC방에 있었던 학생들에게 정확히 적용된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그 사건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깟 취미활동 방해한 것 가지고 피해자 운운하면서 왜 이렇게들 못살게 구는 걸까?'
이러한 오만한 의문의 전제 자체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본질을 알고 나니 지금까지 해석되지 않았던 악플들이 해석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모르고 살아갔을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나는 나의 죽고 싶을 만큼 아팠던 상처와 괴로웠던 시간들에 감사하고 있다.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