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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충환 Nov 01. 2020

05. 그렇다고 비난받아도 되는 걸까?

 새벽 3시 정각, KBS 라디오를 튼다.  


 “KBS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규정을 준수합니다. 여기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입니다”


 이러한 뭔가 의미심장하면서도 공영 방송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멋들어진 멘트가 흘러나온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MBC의 새벽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여러분께서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보내드리는 HLKV 문화방송 라디오를 들으셨습니다. 중파 900kHz 출력 50kW 초단파 95.9 Mhz 출력 10kW로 방송되는 저희 문화방송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 규정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애국가가 흘러나온다. 과거 라디오 정파 시간에 방송했던 멘트다. 가장 깊은 새벽, 라디오의 이 멘트들을 들어본 사람은 아마 대한민국에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기관이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다. '방송의 공정성과 공공성을 보장하고, 정보통신상에서 건전한 문화 창달과 올바른 이용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설립된 정부 기관이다.

 내 뉴스가 나가고 약 한 달 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입장을 냈다. 비객관적이고 작위적인 실험 결과를 게임의 폭력성과 직접 연관 지어 단정적으로 보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회사에게 중징계인 ‘경고’ 처분을 내렸다. 방송사로서는 굉장히 큰 징계다. 방송 재허가 심사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감점'에 해당하는 '벌'이다. 나로 인해 회사가 중징계를 받은 것이다.


 나는 '심의위의 제재가 너무 과한 거 아니야?'라는 생각에 며칠 밤잠을 설쳤다. 억울했다. 그들이 문제 삼고 징계를 내리는 기준과 정의가 모호했다. 과연 제재까지 가해야 하는 이유인 것인가? 잘못한 놈에게는 스스로를 방어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방송에는 강력한 잣대를 들이대며 제재를 가하면서, 악플에 처참하게 물어 뜯기고 있는 개인은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도에는 바로 반응하면서, 살해 위협까지 이뤄지고 있는 정보통신 행위는 들여다보지 못한 걸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설립 목적이 '정보통신상에서 건전한 문화 창달' 이라며? 그럼 인터넷 악플 문화에도 칼을 대야 하는 거 아닐까? 심지어 그 악플들로 인해 사람이 계속 죽어나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나의 넋두리다.


 회사 내부에서는 나에 대한 징계 소문이 스멀스멀 돌기 시작했다. ‘튀려고 애쓴다’ ‘나대다 사고 쳤다’라고 수근 대는 험담도 귀에 들려왔다. ‘정직 3개월이나 6개월이 떨어질 것이다’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회사는 나에게 아무런 징계를 내리지 않았다. 취재기자의 과한 의욕에서 비롯된 실수를 처벌해, 적극적 취재 활동을 위축시킬 수 없다는 회사의 판단이었다. ‘비판’과 ‘제재’는 다른 문제다. 비판은 발전의 자양분이 되지만, 제재는 발전을 가로막는다. 회사는 나를 징계하지 않고 꾸짖음에 그쳤다.


 사람들은 언론을 권력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MBC 같은 대형 방송사는 거대 권력이라고 생각한다. 언론이 세상에 내놓은 메시지가 미치는 힘을 ‘권력’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권력이라는 단어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과하다. 하지만 아니라고 딱 잡아떼진 못하겠다. 언론의 메시지는 분명 사회 특정 집단이나 현상을 굴복시켜 제어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정부처럼 강제력이 있지는 않지만 여론을 형성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사회적 변화를 이끈다. 이 때문에 언론사는 올바른 메시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스스로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한다. 하지만 종종 메시지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때도 있다. 이를 바로 잡고 견제하기 위해 언론 시민단체가 있고 정부 관련 기관이 존재하는 것이다. 건강한 관계다.


 나는 소위 거대 언론사의 기자다. 때문에 다른 누구보다 더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해야 함이 맞다. 나의 말과 행동과 글이 올바라야 하고, 정의롭고, 틀림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기자 이전에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수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소위 권력이라는 이유로, 공인이라는 이유로 실수가 용납이 안되고 내 인격이 심하게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모욕과 과도한 비난이 있다면 정당한 항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마저도 허락이 안된다면, 그것은 사회적 폭력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러한 폭력적 잣대를 잔인하게 들이대고 있진 않을까..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누군가의 극단적 선택을 미필적 고의로 종용하고 있진 않을까..   



 

 '가짜 사나이'가 인기다.


 온 나라를 뒤집어 놓으셨다. 일반인들의 특수부대 극한 훈련 체험은 대중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일으켰다. 기존 미디어에서 보고 들을 수 없었던 콘텐츠의 직설적 표현들에 사람들은 쾌감을 느끼며 짜릿해했다. 극한의 훈련 중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 본성을 관찰하면서 느낀 애증의 감정들이 가짜 사나이의 인기 요인이 아닐까 싶다.

 유튜버 출연진들은 순식간에 스타가 됐다. 그러나 도시의 빌딩이 높을수록 그림자 또한 길어지듯이, 인기가 높은 만큼 부작용의 그늘도 짙고 길었다. 자극적 상황 연출과 잔인함이 주는 불편함으로 인해 비난이 일기 시작했고, 일부 출연자들의 개인적인 문제들이 잇따라 세상에 드러났다. 유명해지자 그들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 숨겨졌던 개개인의 문제들을 노출시키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반인이다. 공인이나 연예인이 아니다. 유명해졌다고 해서 그들이 숨기고 싶은 치부를 세상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콘텐츠 그 자체를 즐긴 것이지, 그들의 문제들까지 알기를 원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완벽한 도덕성 또한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부가 드러나자 대중은 분노했다.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악플의 수위가 도를 넘기 시작했다. 선을 넘은 비방으로 그들의 가족과 지인들까지도 욕설로 인격을 훼손당했다. 그리고, '자살하라'는 충격적인 공격도 이어졌다.


'가짜 사나이' 제작자인 김계란 씨가 보다 못해 본인 인스타에 일갈했다


 나는 과거 나와 내 부모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악플들이 떠올랐다.


 물론 나와 그들 출연진의 잘못은 전혀 다른 개념의 문제다. 하지만 악플러들은 공격 타깃이 정해지자 나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까지 강요했다. 도대체 어떠한 분노가 죽음까지 부추기게 하는 걸까? 과거 연예인 등 일부의 극단적 선택이 그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줬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건 '소시오 패스'다.   

 '가짜 사나이'의 출연진들은 왜, 일면식도 없는 익명의 사람들에게 그토록 극도의 악의적인 공격을 받아야만 했을까?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사람이다. 더욱이 공인이 아닌 개인이다. 그들 또한 인격이 훼손되어선 안되고, 정당하게 자신들을 방어할 기회를 줘야 한다.


 그들을 그렇게도 추앙하던 언론과 대중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잔인하게 물어뜯었다.


 대중의 인기를 받았다고 아무리 심한 욕과 비난을 뒤집어써도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할까? 그들이 살아온 삶이 송두리째 폄훼되어도 당사자는 말없이 수긍해야 하는 걸까? 정당한 항의조차도 허락이 안 되는 것일까? 그 항의 까지도 비난의 칼날을 들이 대야 맞는 것일까?


 이는 부조리이자, 암묵적으로 합의된 사회적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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