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단풍 물들듯 사람도 집에 물들어 간다.
집으로부터 5m 반경으로 휑하던 땅이 제법 정원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뜨겁던 여름이 저물자, 들뜬 마음으로 때를 기다리던 조경을 시작했다. 꿈꾸는 정원의 이미지를 수도 없이 그려보았던 데다 짝의 추진력 덕분에 일은 속도감 있게 진행되었다. 콘크리트 벽체와 잘 어울리는 그라스부터 시작하여 남서향에는 해를 좋아하는 층꽃, 에퀴놉스 등의 우아한 야생화와 블루베리, 백앵두 등의 비교적 키우기 쉽고 맛도 좋은 과실수를 심었다. 북서향에는 음지에서도 잘 번식하는 호스타, 고사리 등의 식물이 자리하고 있다.
2주 사이, 발목 높이부터 허리춤까지 오는 크고 작은 식물들이 저마다 뿌리내릴 한두 뼘의 땅을 차지했다. 20여 종이 넘는 식물들의 생육 환경이 각기 달라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는 수시로 관심을 주어야 한다. 온통 나에게 집중된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게 만드는 귀한 생명들이다. 매일 비슷해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제 없던 봉오리가 고개를 내밀고, 한 밤 자고 보니 잎마다 노랗고 붉은 물이 들어 온몸으로 가을을 알린다. 땅을 뚫고 뿌리 번식한 싹이 어미 곁에 새끼처럼 아담하게 자라있다.
꽃나무가 있으니, 벌과 나비가 찾아온다. 꽃마다 벌 하나, 나비 하나. 두 손을 무릎에 가지런히 올린 채 몸을 숙여, 꽃에 얼굴을 박고 분주히 날개를 비벼대는 꿀벌 뒤꽁무니를 한참 바라본다. 그라스는 거미들의 작업실이다. 풀마다 거미 한 마리가 붙어있다. 물을 주러 식물 사이로 발을 들이밀 때면 영락없이 거미줄에 걸리고 만다. 거미가 애써 친 그물을 툭 끊어버리고는, 낫또의 실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는 거미줄을 털어내느라 요란을 떤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내지만, 결코 혼자는 아니다.
비 오는 날도 좋아해 왔지만 이곳에서는 그 이유가 달라진다. 내 인식의 울타리에 들어선 생명들이 비를 맞으며 갈증을 달랠 것을 알기에, 마치 마른 목이 적셔지듯 ‘아, 시원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선선해지면 뽑으려 했던 무성한 잡초밭은 가만 보니 새들이 자주 찾는 맛집이다. 새들이 오면 창을 열어 소리를 듣는다.
이 땅은 돌이 많아 삽질이 힘들다며 불평했는데, 땅 팔 때마다 나오는 팔뚝만 한 돌들은 똑같은 모양 하나 없이 매력 있어 조경용으로 요긴하게 쓰인다. 집 바로 옆 개울가에도 역시나 돌이 넘치는데, 돌무더기 틈새로 다람쥐가 쏘옥 쏙 드나든다. 다람쥐 쉼터구나. 관찰하면서 나의 세계는 확장된다. 더 알게 되기를 바라다가, 뭐 하나 제대로 안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스스로 되묻는다. 정원을 어슬렁대며 그저 정보를 수집할 뿐이다.
원래부터 이 땅에 살던 생명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온 외부인. 생존으로 촘촘하게 연결된 팀에 끼어든 무지한 인간이다. 나도 여기 낄 수 있게 잘 해볼게. 멋모르고 민폐 끼치면 어떤 방식으로든지 알려줘. 가급적 살살. 주변을 두리번대며 혼잣말한다. (홍천집에서 혼잣말, 좀 많이 한다….)
정원보다 시간을 많이 보내는 장소는 주방이다. 나를 아는 주변 모든 이들이 낯설어할 모습이다. 서울에서는 요리를 도맡아 하던 짝이 가장 기뻐할 일이기도 하고. 여하튼, 배달 음식은 고사하고 택배도 집 앞까지 배달이 안 되는 이곳에서 생활은 여러모로 새롭다. 적응하려면 달라져야지 나라고 별 수 있을까. 머리로는 늘 배달 음식 말고 직접 요리해 먹자 되뇌면서도 잘 안되던 실천이 이곳에서는 묵묵히 하게 된다. 하게 되니 재밌고, 이왕이면 잘해보고 싶은 의욕도 생긴다.
냉장고를 여니, 반제품, 완제품은 있는데 요리할 식재료가 턱없이 부족하다. 다 있는가 싶으면 마늘이 없고, 양파가 없고, 된장이 없다. 새삼 식재료 하나하나의 존재감이 두각을 드러낸다. 집 앞 텃밭에 대한 갈망이 생긴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시선과 적응하려는 내가 낯설고 새롭지만, 이 느낌 나쁘지 않다. 좋다.
엄마와 통화 중에 빠지지 않는 말. 그래서 뭐, 먹을 거는 있고? 그 말에 내성이 생길 법도 한데 나는 기어코 잔소리로 받고 핀잔으로 돌려준다. 맨날 엄마는 쓸데없는 걱정만 한다. 나 아주 잘 먹고 잘 사니까, 맨날 먹는 얘기만 하지 말고 다른 얘기 좀 하자 한다. 그래도 엄마는 철부지 딸내미에 관해선 내성이 아주 강하다. 꿋꿋이 저번에 담근 물김치가 잘 익어 맛이 아주 좋으니, 주먹만치 포장해서 보내준다고 한다. 이게 바로 천연 소화제라는 뒷말을 꼭 보태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엄마에게 SOS를 보낸다. 묵은지 좀 남았어요? 아, 그, 있잖아. 집에 가면 맨날 먹던 엄마 쌈장 너무 맛있는데, 그 집된장도 좀 보내줄 수 있어? 배달의 민족도, 어떤 대형 마트도 보유하고 있지 않은 유일무이 엄마 손맛 식재료들. 이제야 귀한 줄 알아서 꼬리 흔드는 고얀 딸내미가 뭐가 예쁜지 엄마는, 당연히 있지~ 또 필요한 거 다 말해보라며, 너그러운 마음씨로 나를 쓰다듬는다.
손바닥 길이의 통통한 가지 대여섯 개, 길쭉길쭉 싱그러운 색의 대파 다섯 줄기, 딱 봐도 폭삭 익어 군침이 도는 묵은지 네 포기, 색깔부터 일반 된장이랑 차이 나는 꾸덕꾸덕 집된장, 텃밭에서 갓 따온 호박잎과 애기고추….
소중한 식재료 꾸러미, 엄마 발 택배가 도착했다. 집에서 10분을 걸어 내려가면 마을 초입에 펜션이 하나 있는데, 마을 외길 따라 구석에 위치한 집 택배는 대부분 이 펜션 앞뜰에 배송된다. 상자를 열자마자 용수철을 누른 듯 탄성이 튀어 오른다. 하나하나 빛깔 곱고 귀하고, 사랑이 듬뿍 담겨 예쁘다. 아잇, 호박잎은 손질까지 해서 보냈네. 그간 얼마나 꼴을 부렸으면, 반찬들도 작게 소분해서 보관하기도 좋고 먹기도 좋게 담겨 있다. 알록달록 꾸러미 너머로 엄마의 야문 손과 야물지 못한 마음을 그려본다.
음식 귀한 줄은 이미 듣고 보고 자랐음에도 기어이 내 손으로 부족함을 체감하고 나서야, 안다. 엄마의 사랑을 헤아릴 줄 아는 마음도 조금 생겼나. 귀한 불씨 꺼지지 않게 호호 불며 키워나가야 할 마음. 땅따먹기 하듯 무럭무럭 기세를 키워, 이기심의 자리에 돗자리 펴기를….
냉장고 안에 제각기 놓인 낱개의 재료들은 몇몇이 팀을 이뤄 ‘요리’가 된다. 가지, 양파, 감자, 된장, 두부, 마늘, 대파, 묵은지…. 멀뚱멀뚱 재료를 보다 블로그를 뒤져 손쉬운 가지 요리 레시피를 찾는다. 현미밥 안치고 양념장 만들고, 뽀득뽀득 가지 씻어 길이로 반 숭덩 자르고, 벌집 모양 칼집을 내어 버터에 노릇노릇 굽는다. 잘 익은 가지 덜어내고 채 썬 양파 볶다가 양념과 물 넣어 자작할 때까지 끓인다. 고소한 현미밥 위에 버터 내음 품은 가지와 매콤달콤 짭짤 양념장 올린 후, 송송 썬 파 올려 버터 가지구이 덮밥 완성!
간단한 요리 하나 완성했다고 이리 기쁠까. 손수 하는 작은 일 하나에도 가득 차오르는 기쁨만큼, 작아지고 주눅 든 자아의 조각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싶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기본적인 것도 이때까지 못 했다니, 어른 시늉만 했지 여태 어렸구나 한다. 그렇다고 어른이면 으레 하는 더 높은 수준의 미션에 덤빌 짬은 아니다. 차근차근 그간 몰라도 된다며 미뤄뒀던 생활의 손길을 배워 가려 한다.
한 달 전 즈음, 볼일이 있어 서울로 가는 길에 짝이 말했다. ‘이제 우리 단둘이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네. 문득 서로가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요즘 어떻게 너에게 영감을 줄까, 그 고민하는 거 있지?’ 참, 이 녀석은 무엇이든 할 맛이 나게 하는 최고의 파트너다. 새로운 환경이 반복되던 생활에 변주를 주듯,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워 보자. 평생 알아도 다 모를 사람인데, 쉽게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계하자. 모르던 맛은 과감히 도전하고, 알던 맛도 새로 느끼게끔 그렇게 살아가 보자, 이 집에서.
근데 있지, 이곳에 우리 둘만 있는 거 아니더라.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