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경 Oct 18. 2024

'모른다'에는 희망이 있다.

11. 행복한 전원생활 중에도 마음은 봄여름가을겨울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나날들 사이로 날카롭게 비집고 드는 어둠을 마주해야 할 때가 온다. 직감으로 안다. 이건 내가 무서워하는 밤이라는 걸. 구태여 밤을 향해 걷지 않아도 밤은 필연적으로, 내게 온다. 피할 수 없는 밤 앞에 서면, 어렸을 적 상엿집 앞을 지날 때처럼 숨 참고 소리 죽여 걷는다. 악몽을 꾸고 가위에 눌릴 때면 주기도문 외우며 새끼손가락 펴내려 애쓰듯, 아등바등 평행 세계를 그려보지만 소용없다.


  어두운 밤, 그 안에는 알기 싫은 세계가 있고 나의 나약함이 있고 소중한 사람의 고통이 있고 홍수처럼 불어나는 걱정이 있고 원치 않는 사고가 있다. 심장을 할퀴는 가시가 있고 때를 벼르는 까마귀가 있다.


  햇볕 가득 묻혀 뽀송하게 말려둔 조각 덕에 이번에도 추락은 면했다. 나의 단단한 행복은 낙상 방지용. 캄캄한 밤에도 헛발 딛지 않도록 단전에 힘을 채워 넣어준다. 용케도 삼켜지거나 풀썩 쓰러지지 않는다.


  이런 날에는 짝의 곁에 조금 더 가까이 있고 싶다. 나는 절대 모를 추운 밤을 보내고 지금의 낮을 맞이했을 그의 온기가 한겨울 화로처럼 따뜻하다. 그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한 팔을 감싸 안고 있노라면, 살갗부터 마음까지 퍼진 냉기가 조금씩 데워진다. 잠시만 빌릴게.


  어두운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내가 가진 이야기 중 밝은 것, 뽀송뽀송한 볕 냄새가 나는 양지의 것들만 쓰고 싶다. 무엇보다 제1의 독자는 나니까. 나에게 따뜻한 볕과 볕 덕분에 귀해지는 그늘 정도의 어둠만 주고 싶다. 밤은 때로 술과 같아서 취기를 돋우고 감정을 요동치게 하고 그 안에서 허우적대게 한다. 그렇기에 어둠 앞에서 태연할 수는 없어도, 취하고 싶진 않다.






  온종일 잡초를 뽑았다. 줄기와 잎은 여리고 작은데, 뿌리는 질기고 깊어 맨손으로는 좀처럼 잘 안 뽑히는 풀이 있다. 칡넝쿨은 뽑는 게 아니라, 캐야 한다. 팔뚝보다 굵은 원뿌리를 찾기까지 눈에 보이는 줄기를 온몸으로 당기고, 땅을 기며 아래로 아래로 깊이 내려간 뿌리를 찾아 호미질을 해댄다. 마음이 어지러우니 더 집요하게 기를 쓰고 풀을 뽑는다. 풀이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땀 한 바가지 쏟고 훤해진 마당을 보는데 후련함과 뻐근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손마디가 아려서 손바닥을 펼쳐 보니, 가운뎃손가락 가운뎃마디에 불룩하게 물집이 잡혔다. 나무 가시에 찔린 이곳저곳이 욱신거린다. 아리아리 쓰리쓰리. 잠깐 숨을 돌리는데도 생각이 비집고 든다. 그래도 어딘지 모를 마음 한 구석 아픈 것보다야 눈에 보이는 데가 아픈 게 낫다면서, 아픈 마음을 애써 외면해 본다. 손바닥 흙 털듯 툴툴 털어버리고 일어서자.


  다음날, 짝은 당근으로 블루베리 묘목을 구입했다.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열 세대 남짓의 작은 마을이었다. 우리 부모님 연배 되는 어르신이었는데, 이제 전원생활 정리하고 도시로 돌아오라는 자녀들 등쌀에 나무를 정리한다고 하셨다. 그간 홍천에서도 잘 자라는 내한성 강한 블루베리종을 검색하고 재배 방법을 공부했다. 어르신께 종을 물으니, 그런 건 오래 지나서 모르지만 잘 자라고 무엇보다 달고 맛있다 하셨다. 그러고 보니, 종을 모르는 건 문제가 안 된다. 이 땅에 뿌리내리고 열매 맺은 나무인데 인터넷 정보보다 안전할지도 모른다. 아하. 전원생활? 당근이지! 무릎을 탁 친다.


  이틀 연속으로 잡초 뽑고 흙 나르고 꽃 심고 나무 심었더니 초저녁부터 잠이 쏟아진다. 저녁 8시에 곧장 침대행이다. 짝은 밤 11시가 되도록 비탈길 흙을 지탱해 줄 지피식물, 월동이 가능한 야생화를 공부한다고 눈 한번 안 떼고 폰을 보고 있다. 짝 혼자 열심인 상황이 못내 미안해서 눈을 비비며 졸음과 싸우는 내게, ‘먼저 자. 알아서 잘 키워볼게.’라는 짝. 고맙고 든든하고 멋지다고 생각하면서도 괜한 소외감을 느낀다. 함께 뛰는 마라톤에서 중도 이탈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스스로 힘없는 채찍질을 해보지만 영 기운이 안 난다. 이대로 허덕이며 따라가면 어떻게 될지 이제 안다. 페이스를 유지해야 병이 안 난다.


  지구력. 지구력이 필요하다. 중강도의 동일한 페이스로 지치지 않고 달릴 힘. 한 번에 폭발적인 힘을 쓸 수도 있어야 하겠지만, 오래 꾸준히 쓸 힘도 중요하다. 심폐 지구력, 근지구력. 마음 지구력. 나는 지금, 지구력을 길러야 할 때다.


  아침 달리기를 시작한 지 3주가 지났다. 달리기 습관이 들면 근력운동과 안정성 훈련까지 고루 해볼 참이다.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마음이 흔들릴 때 지치지 않고 잘 붙들어주고 싶다. 작심 3일을 넘어 작심 3주를 지났으니, 희망이 있다.  






  며칠 동안 다 무너질 듯 슬픔에 잠겼던 엄마 목소리가 오늘은 씩씩하다. 저울추로 균형을 잡듯 엄마가 힘들면 나는 무척 씩씩해진다. 씩씩한 마음이 걱정을 이기고 단단하게 뿌리내릴 수 있게. 그러나 아무도 없는 혼자인 시간에 마음을 마주하니, 잔잔했던 감정이 일렁이려 한다. 그런 중에 걸려 온 전화로 엄마의 힘찬 목소리를 들으니, 고여있던 흙탕물 위로 세찬 비가 쏴 내리는 것만 같다. 흙탕물은 맑아지고 해가 곧 날 것도 같고.

 

  가만히 창밖으로 보이는 산을 바라본다.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산등성이는 거대한 먹색의 덩어리로 바뀐다. 짙은 검은색 산과 옅은 검회색 하늘의 경계. 단순함이 주는 아름다움이 있다. 어렸을 적 도화지에 가로로 선 하나만 그으면, 땅과 하늘 완성이었다. 바다와 하늘일 때도 있었고. 더 짙은 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불을 끄고 완전히 깜깜해져도 시간 지나면 눈은 어둠에 적응하고 무언가를 볼 수 있게 된다.


  가로등 하나 없는 이곳에서의 밤은, 쏟아지는 별을 볼 수 있다. 어두워서 별은 더 선명하게 빛난다. 어둠을 대하는 방법은 누구에게 배울 수 있을까. 이미 배우는 과정인 걸까. 어쩌면 어둠은 우주나 심해처럼 미지의 세계라서 두렵지만, 그 안에 도사리고 있을 위험에만 집중하느라 무수한 아름다움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밝아서 안전하다고 생각한 낮에도 위험은 있다.


  내 힘으로 어찌 안 되는, 나를 넘어선 차원의 일들이 일어나면 무섭다. 가족에게 원치 않는 일이 생기면 돌부리에 걸린 듯 휘청한다.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도 밤처럼 온다. 밤의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 아무도 모르고, 아직 모른다. 이 ‘모른다’에는 희망이 있다. 앞날을 무제로 두고 싶은 건 나의 소박한 욕심이다.




어지러운 마음에 위안을 주는 고양이와 도토리.
풀 뽑다 말고 한숨 쉰다고 앉아있으니, 길고양이가 다가와 몸을 비빈다.(좌)
집 옆 참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가 귀여워 나란히 놓아보았다.(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