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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경 Nov 01. 2024

지나온 노래

13. 눈물을 흘리게 한 노래가 있나요?


  요즘 음악을 잘 듣지 않는다. 달리기 할 때 빠른 박자의 경쾌한 노래를 골라 듣긴 하지만. 홍천집에서는 집중을 뺏길 소음이 많지 않기도 하고, 되려 자연이 들려주는 새, 물, 바람 소리에 집중하고 싶어진다. 짝에게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 작년 생일 선물로 받은 에어팟 맥스는 서울집에 먼지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쓰지 않는다고 무용한 것은 아니다. 외부 소음과 단절되어 나만의 춤을 추고 싶던 나, 티모시 샬라메처럼 간지나고 싶던 겉멋 든 나. 에어팟 맥스에는 그랬던 내가 어른거린다. 그게 왜 필요하냐고, 길 가는데 노이즈캔슬링이 너무 잘 되면 위험하다며 안 사준다더니. 짜잔, 언제고 항상 내가 원하는 걸 선물해 주는 너. 선물을 받고 팔짝팔짝 뛰며 좋아하던 나, 얼마 못 가 시멘트 바닥에 떨궈버리는 바람에 제대로 흠집이 난 썰. 추억이 어른거린다. 올겨울엔 귀마개로 써야겠다.


  퐁당퐁당. 별다른 큰일이 없다면 이틀 간격으로 아침 달리기를 한다. 달린 후 먹을 아침밥을 위해 전날 밤 현미를 불려놓는다. 달리기 전에 밥솥에 안친다. 밥 먹고 정원에 나가 돌도 옮기고 잡초도 뽑고. 갓 지은 집은 군데군데 손 갈 일, 여기저기 발품 팔 일이 많다. 사두고 읽지 못했던 책을 읽고, 서너 시간 진득하게 글을 쓴다. 하루하루 나름의 규칙과 리듬감 있게 살아간다. 그러나 언젠가, 고인 듯 제자리에서 울렁일 때가 있었다. 그때, 만났던 노래가 있다.

 

 ‘고단한 하루 끝에 떨구는 눈물’

  

  한겨울 찬 공기에 들키고 만 한숨처럼, 옅게 부스러지는 목소리로 시작되는 노래. Sondia의 ‘어른’. 노래의 첫 구절을 듣고 눈물을 떨군 날이 생생하다.

   

  2018년 8월 어느 날 새벽, 도쿄 나리타 공항에서 심야 버스를 타고 숙소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짙은 어둠이 깔린 거리에는 드문드문 보이는 가로등이 별처럼 빛났다. 피로감에 진득하게 눌린 몸이지만 들뜬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함께 떠나온 동행 아영은 내 왼쪽 귀에 이어폰을 꽂아주었고, 우리는 창밖 풍경을 따라 음악을 들었다.


  들뜬 마음이 못내 간지러워 발끝을 까딱거리는 중에 Sondia의 ‘어른’이 흘러나왔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봤던 터라 귀에 익은 노래였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노랫말은 마음 깊이 파고들었고 날카롭게 급소에 명중했다.

   

  ‘나는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휴가! 일탈! 여가! 따위의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떠나왔다. 여행으로 일상이 재충전되기를 바랐는데,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나 보다. 물길이 없어 웅덩이에 갇힌 물처럼, 몸도 마음도 점점 탁해지고 있었다. 좀처럼 마음 같지 않은 삶, 치유되지 않는 유년기의 상처, 과거 연인과의 건강하지 못한 관계, 즉흥적이며 알코올 의존적인 생활.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 그게 나였다.


  사소한 것에도 곧잘 행복을 발견하는 나였지만, 닫을 줄 모르는 문으로 바람 같은 허무가 쉽게 드나들었다. 헛헛한 마음. 불만족스러운 생활은 남 탓과 자기 합리화를 거쳐 자기 책망으로 이어졌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와 ‘내가 뭐 어때서’를 왔다 갔다 하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정체 모를 무언가를 해소하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떠난 여행이었다. 정체를 모르니 해소할 수도 없겠지만. 뭐, 딱 그런 상태였던 거다.


  노래를 들으니 일순간 명확해졌다. 정체를 모를 대상은 나였구나. 삶의 방향성을 찾아야만 했다. 제대로 숨 쉬려면 나는 누구이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눈을 감아보면 내게 보이는 내 모습 / 지치지 말고 잠시 멈추라고’

  

  주옥같은 노랫말은 눈앞을 지나치는 버스를 잡아 세우듯 나를 힘차게 두드렸다. 멈춰선 나는 나를 선명하게 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느꼈다.       툭.    투두둑.  툭.         투둑투둑.             눈물은 막을 새 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아영은 말없이 어깨를 토닥여주었고, 우는 중에도 배가 고팠다. 우리는 숙소 앞 심야식당에서 라멘을 먹었고, 다음날부터 시작된 일주일간의 여행은 전과 사뭇 다른 온도였다.

  

  일상으로 돌아와 삶의 여러 부분을 정리정돈했다. 시나브로 나를 좀먹었을 모든 것들을, 조금씩 아주 천천히. 상처를 주고받던 관계를 끝맺었고, 자신을 동정하던 알량한 시선을 거두었다. 여러 단톡방을 나왔고, 술을 줄이고 술자리도 마다했다. 책을 읽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웠던 생각과 감정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쓰인 글로 나를 읽으니 낯설었다. 나는 타인이 되었고, 타인 위로는 내가 전문이었다.


  그 노랫말은 힘없이 붙들고 있던 마지막 잎새를 떨궈주었고, 그날 흘린 눈물은 언 땅을 녹이고 만물이 싹트게 할 봄비가 되었다. 시적으로 표현해 본다. 내면을 깨우는 우연의 행운은 누구든 시인이 되게 만든다.


맑은 풍경 소리에도 쉽게 마음이 동하던 때, 2018



 


 '어떤 날 어떤 시간 어떤 곳에서 나의 작은 세상은 웃어줄까'


  5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 시절 나를 만나 웃는다. 잘했다고, 기특하다고. 가끔 Sondia의 ‘어른’을 찾는다. 예전처럼 노랫말 그 자체에 동요하기보다, 힘을 내어 걸어온 나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어린 내가 조금은 더 어른이 되었을 나의 등을 토닥여준다. 어디를 향해 가고 있냐고 묻는 노랫말에 눈물 대신 웃으며 답할 수 있다. 목적지는 없어. 그저 내 손을 잡고 걸으며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어.


  음악은 나도 몰랐던 나를 밖으로 꺼내준다. 드러내고 대변하고 보듬고 위로한다. 책을 읽다 전율을 일게 하는 하나의 문장을 만난 것처럼, 과감하게 시간을 멈추고 머무르게 한다. 다시 시간이 흐를 때면, 모든 것은 달라져 있다.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여도 괜찮다. 세상을 보는 눈이 1도만 달라져도, 평소와는 전혀 다른 길을 발견할 틈이 생긴다.

 

  친구 한으로부터 선물 받은 책이 있다. 작년 여름에 책을 받고 고맙긴 했지만, 쓱 훑어보고 제대로 읽지 않았다. 행복을 찾아 시골로 떠난 이의 수필집이었다. 왠지 다 아는 이야기 같고 내가 사는 게 더 재밌었다. 올해 가을, 책장에 먼지를 털다 다시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웬걸? 이야기가 너무 재밌고 흥미로워, 작가가 운영하는 유튜브까지 구독하고 말았다. 예전에는 외면했던, 구석에 박혀있던 책 몇 권을 책상 위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었다. 종종 지나간 것들은 다르게 해석된다. 내 안에 물길이 잘 나 있음을,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되는 기분 좋은 순간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받은 목소리로 나만의 노랫말을 지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내가 나로 사는 만큼, 타인도 타인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은 각개전투가 아니라 얼기설기 엮인 공생 구조이므로,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코어와 더불어 유연한 팔다리를 가질 필요가 있다. 따뜻한 가슴을 지닌 유연한 팔다리는 누군가를 끌어안고 등 떠밀어 주고 다가가고 함께 뛰어줄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크고 작은 기적을 만들며 사는 것 아닐까.


  오랜만에 음악이 듣고 싶다. 오늘 같은 날은 가을방학의 ‘취미는 사랑’이다. 발걸음은 걷고 싶은 곳으로 향한다. 





곳곳에 가을이 완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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