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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경 Nov 09. 2024

담 너머의 발견

14. 시골 마을, 이웃이 생기다!


  “괜찮으시면, 잠깐 들러서 차 한 잔 하세요.”


  시월 어느 오후, 이웃의 초대를 받았다. 길 건너 살짝 아래에 위치한 옆집 내외분의 연락이다. 오가며 가벼운 눈인사에서 연락처를 주고받기까지 한 달가량 걸린 듯하다. 두 분이 딱 우리 부모님 연배라서 포근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한창 나무 심느라 흙 묻은 옷과 장화를 툭툭 털고 쪼르르 달려갔다. 호두파이 반 접시랑 홍시 여섯 알을 챙겨서!


  옆집의 안내를 따라 정원에 들어섰다. 길에서는 시야가 차단되어 잘 볼 수 없던 터라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푸른 잔디와 소담한 멋이 있는 나무들이 빙 둘러 우리를 환영했다. 두 분의 손길이 닿았을 곳곳에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땅을 구매한 지 20년, 들어와 산 지는 8년으로 까마득한 홍천살이 선배님들이었다.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사모님과 무뚝뚝한 듯 보이지만 한 번씩 재미있는 농담을 던지는 사부님. 이웃 초대는 처음이라 쭈뼛쭈뼛 어색한 우리.


  “안으로 들어와요.” “앗, 네…. 그런데 저희는 바깥에서 먹어도 좋습니다. 옷이 깔끔하지 못해서요.” “아잇, 무슨 소리. 우리 다 똑같지~ 우리도 맨날 하는 게 흙 묻히고 사는 건데요. 괜찮으니, 얼른 들어와요.” 거듭 정말 괜찮다는 말과 어서 들어가자며 살포시 등을 거두는 손길. 두 분의 다정한 환대에 따뜻해졌는지 문턱을 넘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집 안은 천장과 벽을 두른 편백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사모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푸른빛 접시에 정성스러운 음식이 하나하나 올라왔다. 볶은 견과류와 말린 블루베리 올린 그릭요거트, 따뜻한 차, 호밀바게트와 치즈와 꿀, 풍미 가득 과카몰리, 크림치즈 품은 얼린 복숭아. 음식의 맛과 모양새가 건강하고 따뜻하다. 손님맞이 할 때면 디저트 가게에 달려가 그럴싸해 보이는 빵을 산다고 종종거리던 나는 아, 나도 이렇게 누군가를 환대해야지!’ 마음먹었다.



  그날 우리는 홍천살이에 도움이 되는 팁을 여럿 얻었다. 홍천에서 잘 자라는 과실수 종류와 잘 키운 과일을 몽~땅 새들에게 주는 실수를 방지하는 법, 마을의 역사와 주민들의 정치 맛보기, 이웃 간 갈등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법, 지하수 수질 검사 결과와 그 맛, 근처 맛집 리스트(메모메모), 걷기 좋은 길과 우리 집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산 이름을 귀 쫑긋하며 새겨들었다. 갓 이웃이 된 분들과의 대화가 그 순간만큼은 친구들과의 수다보다 재밌었다.


  알짜배기 정보도 정보지만, 두 분이 주고받는 말과 마주 보며 짓는 표정이 우리를 편안하게 했다. “여보, 이제 말 그만하고 여기 편히 드시라 하자고. 당신 이야기 듣느라 맛있는 음식이 그림의 떡이겠어~하하.” “아유, 이 양반이 원래 과묵한 편인데 오늘따라 말씀이 많으시네. 역사를 다 얘기하네. 호호.” 서로 말이 길어진다 싶으면 한 번씩 농담 섞어 장난을 걸며, 우리를 살폈다. 이야기도 재밌고 음식도 맛있어서 귀를 열어놓고 앞에 놓인 건 다 집어먹었기에 머쓱하게 웃을 수밖에. 그나저나, 친구 같은 부부다. 서로 놀리면서 사랑을 감출 수 없는 눈빛! 두 분을 보며 세월 흘러 나이 지긋한 우리 모습을 겹쳐 그려본다.

      

  수다를 떨다 해가 떨어졌다. 컴컴해진 밤 돌아오는 길 짝에게 말했다. “나 사실, 시골에 오면 그… 오리온 초코파이 광고 있지? 그런 정을 살짝 기대했거든. 서로 오가며 마음을 주고받는 거. 이웃집이 수확한 호두를 건네오면 호두가 담겨있던 병에 무화과잼을 담가 돌려주는 것. 더 친해지면 집에 사람이 없어도 문고리에 따뜻한 무언가를 걸어두는 것. 그런 모습?” 짝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그렇지, 낭만이지.” 하며 어깨를 감쌌다.






  사람들과 잦은 만남은 어렵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잊을만하면 만나는 게 편안하고, 여럿이 왁자지껄 흥겹게 노는 것보다 둘이나 셋이 단출하게 대화 나누는 걸 선호한다. 반나절 이상 뭉근하게 끓인 시래기처럼 구수한 맛이 나는 관계가 좋다. 좀 느리고 따뜻한 관계. 단연코 혼자 있거나 짝과 둘이 있는 시간을 가장 높은 비율로 좋아한다. 사람을 찾아 나갔다가 곧잘 집에 숨어드는 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짝이다. 그렇기에 들뜬 마음으로 쉽게 이웃 간의 정에 대해 재잘대는 나를 보고 웃었을 테지.


   시월 한 달 꼬박 정원 가꾸기에 몰두하면서 담벼락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이웃과의 교류도 늘었다. 옆집 내외분 외에도 윗집, 아랫집, 더 아래 옆집, 마을 초입에 있는 이웃까지 만나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호탕한 웃음 목청 큰 아주머니, 포클레인 고수 슈퍼맨 아저씨, 과묵하지만 다정한 도움을 주던 아저씨, 불쑥 집 안으로 들어와 구경부터 하는 날쌘 아주머니. 사람 사는 곳 아니랄까 봐 각기 다른 역사를 쌓고 살아왔을 사람들이 짧은 인상을 남기며 스쳐 갔다.


  가장 자주 만난 건 역시나 옆집이다. 바지런히 각자 살림을 하다가 마주친 사부님은 “수고 많으십니다!”,“보기 참 좋습니다!” 멀찍이서 쾌활한 인사를 건넸다. 사모님은 종종 텃밭에서 고추, 케일, 가지를 따다 주셨다. “이런 거 좋아해요? 우린 실컷 먹고도 남으니 필요하면~ 원하면 받아요.” 괜찮으면, 필요하면, 원하면…. 의사를 묻고 주는 마음에 배려를 느낀다. 다정함은 이런 데서 배어 나오는 거구나.


  마침, 읍내에서 사 온 사과가 너무 달고 맛있어서 퍼뜩 챙겨 나왔다. 고추와 케일을 가득 안고 우리를 찾은 사모님께 사과 몇 알을 드리려 하니, 손사래 치며 말씀하셨다.


  “아유, 우리 사과 많아. 한 박스나 있어요. 그리고 받으면서 돌려줄 거 생각하면 우리가 뭘 못 줘~ 그러니 두 분 맛있게~ 맛있게! 먹어요.”


  주면서도 받는 사람 편안하게 하는 내공을 눈 마주하며 배운다. 나누는 것도 급하게 준비하면 어설프다. 넉넉함은 필수다. 시간이든 마음이든 수확한 농작물이든. 스스로 필요한 것만 겨우 담긴 나의 초라한 호주머니를 뒤집어 본다. 이곳에서 보내는 해가 쌓일수록 이웃과 나눌 마음도 넉넉히 채워지길 바라며.






  옆집 덕분에 여름과 가을 내내 아삭하고 매콤하고 심지어 무농약인 고추를 넘치게 얻어먹었다. 겨울에는 한동안 이곳에 오지 않을 예정이라고 하셨다. 내년 봄에는 풍성하게 자란 정원의 꽃을 예쁘게 묶어 드리고, 여름에는 우리 블루베리랑 사모님 댁 블루베리를 바꿔 맛보자 해야지! 잘 길렀는지 봐달라며 애교도 부리고.


  까탈진 나에게 너무 좋은 이웃이 생겼다.



현미밥이랑 고추, 된장찌개, 케일 쌈…. 요리조리 맛있게도 먹었다.




  사람과 부대끼는 도시보다 자연 가까이 한적한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좋습니다. 그러나 역시 사람이 있어 정겹네요. 어려운 사람이라서, 사람과 사람 사이 피어나는 온기가 더 귀하고 희망찹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사랑은 역시 기적이고요. 사람의 'ㅁ'이 닳아 동그랗게 되면 사랑이 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동그란 강돌 같은 사랑을 여기저기 잘 굴러가게 마음의 길을 내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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