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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경 Oct 25. 2024

도망 온 자리에서 마주한 것은

12. 혼자인 시간이 익숙해질 무렵


  여기에 도망 온 건 아닌지 스스로 물은 적이 있다. 열정을 태우며 멋진 무언가가 되어보겠다던 분투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숨어지내는, 긴 방학 같아서. 고요하고 평화로운 혼자인 시간에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9월에는 북쪽으로 창이 난 3평이 채 안 되는 작은 방에서 종종 낮잠을 잤다. 서향 해가 깊이 드는 거실과 안방은 여름에서 초가을의 오후 시간을 보내기에는 아직 덥다. 그땐, 북쪽 손님 방이 피서지로 제격이다. 다른 장소에 비해 온도가 3에서 4도가량 낮은 그 방 침대에 누우면, 선선한 바람이 환영하듯 창을 넘어 불어온다. 부드러운 리듬으로 살갗 위를 살랑살랑 부채질하는 바람 덕에 잠이 솔솔 온다.


  창 너머로 참나무 잎이 가득하다. 초점을 좁혀 가까운 거리에는 통통한 몸에 긴 다리를 지닌 무당거미가 집을 짓고 먹이를 기다린다. 북쪽 비탈길 아래에는 집 한 채가 있는데, 그 집으로부터 색소폰 소리가 들려온다. 까무룩 잠이 든 2시간 동안 연주는 계속 이어졌다. 간간이 듣기에 좋으나 모르는 곡은 폰으로 검색하여 제목을 알아내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가 왜 그리 무거운지 그냥 듣고 만다.



아늑하고 조용하고 작은, 북쪽 방에서의 낮잠 / 침대 하나 쏙 들어간다.



  잠이 깰 즈음, 누운 채 사선으로 올려다본 창밖의 구름에 한동안 시선이 머문다. 바람에 흔들리며 바스락바스락 손뼉 치는 참나무 잎사귀도 보고, 몸은 까치를 닮았는데 머리 주변부는 갈색인 이름 모를 새소리에도 귀 기울여 본다. 대중없는 휴게 시간이다. 지금의 내가 정말, 편안한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서울 오피스텔에서 피곤을 달래려 달콤한 낮잠을 잤다. 그러나 지금과 그때의 잠은 쉼의 질이 다르다. 쉬는 중에도 얼마만큼을 쉴지 계산하고 있었다. 스스로 재촉하느라 쉬면서도 모종의 죄책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일하기 위해 쉬고, 쉬었으면 효율 높게 일해야 했다. 일을 열심히 해냈을 때에만 쉬어도 마음이 편했다. 그래야 스스로 납득이 갔던 하루하루. 일을 통해 사회적 인정을 받고, 일련의 과정이 스스로 만족스러울 때 얻는 뿌듯함은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계속 나아갔다. 일과 쉼을 적절히 분배하고 잘 쉬어주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음이 이리 다른 걸 보면 아니었나 보다.


  나는 지금 자발적 백수이고 다음 일을 시작하기까지 유예 기간을 넉넉히 주었다. 홍천집에서의 처음 한두 달은 쉰 다음을 의식하느라 좋다가도 불쑥불쑥 조바심이 났다. 일이 나의 존재 가치가 된 것처럼. 돈을 벌지 않는다고 해서 허투루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9월 어느 낮잠은 질척이는 그 마음으로부터 해방되게 했다. 죄책감 없는 쉼은 그저, 손수 저녁을 차려 먹을 힘이 되었다.






  편한 잠에 관한 생각은 나를 청소년기로 데려간다. 고등학교는 기숙사 생활을 했다. 기숙사의 침대 한 칸에서, 잠에 들 때 느끼는 편안함과 아늑함이 무엇인지 처음 알았다. 선후배 8~10명이 한 데 섞여 생활하던 방에는 한 팔 옆으로 뻗기가 겨우 가능한 통로를 중앙으로 양쪽에 2층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나에게 배정된 침대 한 칸은 좁아서 더 포근한 새 둥지처럼 훌륭한 도피처였다. 고등학교 1학년 기숙사 입소 첫날밤, 침대에 누워 훌쩍훌쩍 우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며 고요하고도 낯선 밤을 맞이했다.


  나의 뒤죽박죽 십 대에는 부모님 관계가 참 많이도 상했고 아팠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그런 밤이 우리에겐 손에 꼽을 정도로 몇 없었다. 이기적이게도 주말 이틀 밤만 집에서 자면 되는 기숙사 생활이 달콤했다. 쿵쾅대는 심장으로 문고리를 붙들고 슬픔과 무력감에 휩싸이지 않아도 되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결혼은 한 화분에 나무 두 그루를 심는 일이라던데. 각자 뿌리내리려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갈등이 있을 수 있다고. 우리 부모님, 닳고 엉키고 잘려 나간 부분이 참 많을 텐데, 인내와 용서와 사랑은 훌륭한 거름이 되는 걸까. 척박한 환경을 개척하며 자란 나무는, 좋은 환경에서 자라 비틀림 없이 반듯한 나무와는 다른 아름다움을 지닌다. 예술적이다. 기암절벽 위의 노송처럼 경이롭고, 다른 나무를 휘감으며 자랄 수밖에 없는 등나무처럼 처절하다. 그러나 등나무 연보라 꽃이 그렇듯, 가시 품은 장미가 그렇듯, 향기롭다. 반세기가 흘러야 가까스로 그려볼 수 있는 관계. 숙성 발효되었을 때 비로소 참맛이 우러나는 그런 사랑도 있는 걸까?


  과거는 지난 일, 공중에 흩어진 말처럼 이미 떠나 정체를 감춘 것.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일, 먼 바다 끝의 수평선처럼 아득한 것. 떠나고 오지 않았으니, 둘 모두 무와 같은 것. 그저 지금 이 순간 찍는 점만이 사실이고, 그것이야말로 나라고 생각해 보지만 어떤 과거는 얼룩으로 남는다. 기억 세포로 남아 몸 곳곳에 발자국을 찍는다. 위로와 용기를 주기도 하고, 무심하고 뻔뻔하게 상처를 헤집기도 한다.


  그래도 세탁처럼 얼룩을 지울 수 있지 않을까. 얼룩진 행주를 과탄산소다 넣어 팔팔 끓는 물에 삶으면 깨끗해지듯 말이다. 쨍한 햇볕에 말리면 옅게 남은 얼룩도 감쪽같이 사라진다는데. 짝의 곁에 있으면 나는 볕에 말린 행주, 그러니까 얼룩이 지워진 말끔한 행주가 된다. 새하얀 행주는 테이블보도 되고, 손수건도 되고, 다른 무엇도 될 수 있다.


  ‘와이낫? 저스트 두 잇! 원해? 그럼 망설일 필요 하나도 없어. 너 원하는 대로 해. 행복에 욕심내도 되잖아?’ 짝이 내게 자주 건네는 말이다. 아무리 좋은 말, 지금 필요한 말이라도 허공만 떠돌고 귓등을 스쳐 지나가 버리기 일쑤인데, 그의 응원은 사랑이라는 관계 안에서 수액 맞듯 쏙쏙 흡수되고 힘이 된다. 내 세상이 그에게 편입된 것처럼 온도, 습도, 채광이 달라진다. 때로는 백사장, 때로는 숲, 때로는 탁 트인 8차선 도로가 되어준다. 염치 불고하고 힘에 부칠 때는 짝에게로 도피하련다.






  그러나 진정한 나의 도피처는 따로 있다. 그 사실을 요즈음 알게 되었다. 홀로 보내는 시간이 늘다 보니 나를 마주할 일이 잦다. 나중 일에 구애받지 않고 하루 이틀, 사나흘을 홀로 보낸 적이 이제껏 언제 있었을까. 처음이다. 혼자 음미하는 고요는 좋다가도 무료해지고 무기력해진다. 무기력해지는 그 순간을 잘 요리해야 한다는 걸 강하게 직감한다. 이 기회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꽉 붙들고 싶다.


  잠깐 나의 밖으로 나가는 것. 나에게 집중된 오감을 바깥으로 돌려 세상과 교감하는 것. 사회적 자아와 순수한 자아 그 무엇도 아닌, 사이의 공간이 진정한 도피처다. 물리적 공간은 아니다. 인식과 인식 사이 무형의 세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흐르는 땀과 숨소리도 잊을 만큼 몸 쓰는 일에 몰두하는 시간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도, 겨를도 없다. 원초적인 세계. 나에게 헌 숨을 내보내고 새 숨을 채우는 재충전의 시간을 허용한다. 도망갔다 돌아올 때도 건강해야 하는데,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임시방편으로 숨는 건 원치 않는다.  


  잡초의 뿌리가 너무 깊으니, 호미로는 안 되겠다. 이번에 읍내에 나가면 곡괭이를 사야겠구나 하는 생각. 굽혔던 허리를 펴고 앞을 올려다보니 호랑이 등처럼 유려한 산등성이에 노랗고 붉은 노을이 걸렸기에, 잠시 멈춰서 감탄하는 것. 무기력에 잠식되기 전에 부지런한 기운이 가득한 마을 사이를 달리러 나가는 실천과 끼니를 소홀히 하지 않고 손수 지어 챙기는 노력. 과거와 미래와 나라는 존재에서 빗겨선 순순하고 정직한 세계는 내면의 불순물을 긷고 회복으로 나아가게 한다.


  도망 온 자리에서, 이유 모를 목마름을 해소하려 신나게 흙을 파고드는 나를 본다. 뿌리와 줄기를 통통하게 살찌우며, 어떤 잎을 돋우고 어떤 꽃을 피울지는 전혀 모른 채로. 몰라도 괜찮다며 씩씩하게 몸을 움직인다. 이 바지런함이면 뭐든 될 것만 같다!


P.S. 이런 환경을 믿음으로 마련해 준 짝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더 근사한 나로 하루하루 보답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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