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서
목적과 의미를 찾는 일은 지겨웠다. 움직이게 하는 힘은 있었다. 뛰다가 하염없이 걸었다. 멈추지는 않았지라며 위로했다. 돌고 도는 영원한 마라톤이었다.
보일 듯 말듯한 거리에 결승선을 달아뒀다. 허리춤으로 하나씩 선을 거두는 걸 허리는 즐겨했다. 이 짓은 수많은 선이 감기고 발에 밟혀 고꾸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허리는 더 많은 결승선을 감고 싶어 했다. 다리는 그런 허리에 지쳐 더 이상 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만하자, 좀 쉬자고."
다리가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거 안 보여 조금만 가면 끝인데?"
허리가 굳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언제 그게 끝인 적 있어? 매번 계속되는 거 아니었어?."
"이번에는 정말이야. 이것만 하면 돼."
다리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불평하며 한 걸음씩 내디뎠다.
"맨 처음엔 일어서기만 하면 행복해질 거라고 했잖아. 바닥에서 뒹굴 때가 훨씬 행복했어."
"왜 이래, 아직 움직일 수 있잖아. 감은 결승선들을 봐 자랑스럽지 않니?"
"뛰었던 건 나인데, 왜 네가 자랑스러워하는지 모르겠네."
"그래, 모든 걸 이룬 건 네 덕분이지. 그래서 행복해졌잖아."
허리는 어르고 달래는 자신의 역할을 자랑스럽게 상기하며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그냥 쉬고 싶어. 무릎이 벌써 다 망가져 가는 것 같아."
"넌 그래서 안돼. 항상 끝까지 하지를 않냐?"
"네가 그런 말할 자격 없어. 넌 한 게 뭔데"
"네가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줬잖아. 움직여야 할 이유를 만들어준 게 나라고.
그리고 당장 가지 않으면 뭐 할 건데? 어디로 갈 건데?"
다리는 혼란스러워하며 멈칫거렸다.
"어디로 꼭 가야 하는 건가? 없다면 당황스러울 것 같긴 하지만..."
"그렇지? 자, 많이 왔어. 끝까지 해보자고."
"끝이 뭔데"
"끝? 저 앞 결승선이지."
"저걸 이루면 또 생기는 거지? 마지막이 아닌 거잖아."
"그래야 행복해지지. 너도 좋아했잖아."
"이젠 그렇지 않아."
"네가 움직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허리는 멈추면 그 모든 노력이 무의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의미가 있어야 해?'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원한 건 끝이 났다. 다리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절뚝거리는 무릎으로 교통사고가 나며 그녀는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5분은 더 빨라지고자 했다. 사람들이 내리기도 전에 지하철 문을 비집고 타야 했고, 문이란 문은 누구보다 먼저 들어가야 했다. 세상에 가장 먼저 나온 맏이 었다. 취직도 결혼도 친구들 중 제일 먼저 했다. 빠르게 결승선을 허리에 감을수록 메달은 늘어갔다. 목에 건 자랑스러운 메달들은 반짝이고 무거웠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종종걸음으로 딱 5분은 더 빨랐던 그녀의 무릎은 고질병에 걸렸다.
남들보다 빨라 안도하던 그녀의 행복은 끝이 났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빨라질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느려지고, 시간에 대한 집착은 무의미해졌다. 그녀는 성취가 헛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 누구보다 빨라지려는 노력의 대가로 남은 건 더 이상 쓸 수 없는 다리뿐이었다.
다리는 침대에 누워,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되새기며 말했다.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들었지? 다시는 걸을 수 없다는 거."
그의 목소리는 무겁고 피로가 가득했다.
허리는 무겁게 내려앉으며 말했다.
"그래 나도 들었어. 이제 뭘 해야 할까?"
"내가 움직이지 못하니까 뭘 할 수 있겠어?"
그는 실망과 비난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원래 다리가 불편했던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야. 뭔가 할 수 있을 거야."
허리는 불편하게 몸을 비틀어 말했다.
"지금까지 내 덕에 행복했던 거잖아. 보여? 근데 이제 메달도, 허리에 감은 선도 다 사라졌어."
다리는 고통에 찬 얼굴로 말을 잇다, 참아온 감정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를 잃고 모든 걸 잃었어! 이제 예전 같지 않을 거야."
그는 분노와 상실감에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그래, 나도 알아. 하지만 그때는 그만두고 싶지 않았어.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이루고 싶었으니까."
허리는 자기변명을 하며, 고통에 젖어 있는 다리를 바라보았다.
"쉬자고 했을 때, 멈췄어야 해. 왜 이렇게까지 버텨야 했는지 모르겠어."
다리는 분노를 토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허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미안해, 내가 모든 걸 다 알았던 건 아니야.
그때는 더 나아질 줄 알았거든.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다니…"
"너의 변명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어. 넌 나를 위한다면서 너만 생각해.
그 대가로 고통만 남았어.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어?"
다리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며 말했다.
허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다리는 씁쓸한 만족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쉬게 된 거군. 이렇게 쉬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제 그녀가 좀 더 가벼워진 것 같아."
"그녀는 가지고 있던 걸 놓았어. 그게 행복이 될지 몰라."
그래야만 이 모든 게 의미가 있었다.
"아직 아닌 걸 알잖아. 너를 잘라내야 된다는거."
허리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렇게 고통받느니 사라지는 게 낫겠어."
"즐거운 시간들을 함께 보냈는데, 이렇게 되다니..."
다리는 조용히 말했다.
"억울하네. 아프고 편안해지겠어"
쿵! 침대에서 떨어진 여자는 뻣뻣한 다리를 부여잡고 병실 문을 향해 기어갔다.
새로 생긴 결승선을 향해서. 그녀의 얼굴에는 고통과 결연한 의지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엿보였다.
다리는 이 마라톤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웃었다.
"이거 봐 영원히 함께 할 거야.
없어지더라도 돌고 돌아 기억하는 게 있지."
허리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없어진다고 해결되진 않겠어."
그의 표정은 여전히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다리는 여자의 모습을 자신과의 마지막 연결고리처럼 느끼며 말했다.
"기쁘네. 애틋하고 슬퍼지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