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간역에서 시가 익어간다

by 레드산


"커피 한잔 테이크아웃으로 부탁합니다."

"어쩌죠? 오늘 제가 자원봉사 첫날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때 카페 안쪽에 있는 사무실에서 체구가 큰 남자분이 나오며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아메리카노 주세요."

커피 통에서 원두를 꺼내 커피그라인더로 직접 갈기 시작한다. 카페에서 흔히 사용하는 커피머신을 쓰지 않고 그때그때 직접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는 모양이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하나하나 정성이 가득해서 참 보기 좋다. 번갯불에 콩 튀겨 먹듯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아날로그 감성을 맛볼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창밖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기다린다. 얼마 안 있어 그윽한 커피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그 향기에 홀로 떠난 여행자의 가슴이 촉촉하게 젖는다.

충북 영동에 있는 황간역 2층 마실 카페는 미안할 정도로 조용하다. 아늑한 실내는 황간역만큼이나 시적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곳곳에 놓인 소품들과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자작시가 미소를 짓게 한다. 카페 한쪽에 있는 액자에 “시와 그림과 음악이 있는 내 마음의 고향 역”이라는 문구가 들어있다. 그중의 음악이 빠졌는데도 그 말의 의미를 카페에서 느낄 수 있다.

카페에 막 들어섰을 때는 느닷없이 맞닥뜨린 고요함이 어색해서 음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것도 잠시 고요함 속에 머물다 보면 그게 잘못된 생각이란 것을 금방 알게 된다.

차분하고 조용한 이 분위기에서는 그 어떤 음악도 소음으로 변할 수 있다. 그냥 지금 이대로 놓아두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 이런 분위기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졸음에 겨운 아이가 스르르 잠에 빠져들 듯이 고요함 속으로 빠져든다. 커피 사러 온 것도 잊은 채 초점 잃은 눈으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영동 여행을 생각하면서 가보고 싶은 곳 두세 군데를 골랐다. 그중의 하나가 황간역으로 순위는 맨 뒤에 있었다. 여행지가 된 간이역을 몇 군데 보았기에 황간역이 어떤 분위기와 모습일지 대충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렇다 보니 꼭 가겠다는 욕심보다 시간이 남으면 갈 생각으로 끼워 넣었다.


노근리 평화 기념관에서 나왔을 때는 벌써 늦은 시간이 되었다. 그냥 서울로 돌아갈지 아니면 마지막으로 남은 황간역에 들릴지를 놓고 잠시 망설인다. 결정하기 위해 내비게이션을 켜고 황간역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확인을 해본다.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황간역이 있다. 더는 주저할 것 없이 빠르게 황간역으로 차를 몬다.


언뜻 보면 황간역은 평범해 보이는 시골 역이다. 생각했던 간이역과 달라 괜히 왔나? 하는 생각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간다. 한적한 황간역과는 달리 광장에는 차들이 빼곡하다. 역을 이용하는 사람들 차가 아니라 누구나 이용하는 주차장으로 쓰이는 모양이다. 한쪽 귀퉁이에 비어 있는 자리에 차를 세우고 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제야 차에서 보지 못했던 황간역의 모습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역 광장에는 시를 써놓은 항아리들이 가득하다. 시를 써놓은 색 바랜 기왓장도 많다. 그것들을 역사 주변 곳곳에 예쁘게 배치해놓았다. 그 덕분에 평범한 시골 역이 고상하고 우아하게 변했다. 황간역에는 그렇게 시들이 주렁주렁 열려 맛있게 익어간다. 시를 알지도 쓸 줄도 모르지만, 시가 있어 황간역이 정겹게 느껴진다.

좋아하는 분으로 만났던 인연이 있는 김용택 시인의 작품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기차가 들어오려면 시간이 있는지 역을 드나드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황간역은 경부선을 천천히 달리는 무궁화 열차가 하루에 7~8번 쉬었다 간다. 잊을 만하면 기차가 한 번씩 섰다 가는 정겨운 역이다.


아담한 대합실은 옛 정취와 향수를 물씬 풍긴다. 어디론가 떠나는 아주머니와 중년 남자 두 사람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대합실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이것저것이 많아 산만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시가 있어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대합실 한쪽에는 책과 사진들이 전시된 작은 공간이 있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읽을 수 있는 책들이 꽂혀 있고, 벽에는 사진 작품들이 걸려 있다. 바닥에는 요즘 보기 어려운 예전 농기구들이 수줍은 듯이 자리 잡고 있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에 코를 박는 것보다 이곳에서 메마른 감성을 추슬러보는 것도 좋겠다.


대합실에 있던 두 남자가 뒤따라 들어온다.

"이게 뭐더라? 많이 보던 건데?"

"이 사람아! 그거 옛날에 가마니 짤 때 쓰던 거 아닌가."

“그렇구먼. 참 오랜만에 보네”

"사람 많고 복잡한 대도시 역보다 여기가 더 좋은데."

“그러게 말이야!“


맞는 말이다. 황간역은 정신없이 오가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는 대도시 역에서 절대 느낄 수 없는 정감이 있다. 시간을 가르며 쏜살같이 달리는 기차가 있기 전에는 느리게 가는 기차가 이런 시골 역을 하나하나 거쳐 다녔다. 세상이 정신없이 빠르게 돌아가다 보니 이제 시골 역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가는 세월을 피해 가지 못한 노인이 뒷방 신세로 물러난 것 같은 서글픔이 느껴진다. 문득 가수 서유석 씨가 부른 노래의 한 소절이 생각난다.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



플랫폼으로 나가는 대합실 문을 조심스럽게 밀쳐본다. 괜히 그랬다 싶을 정도로 걸리는 것 없이 문이 열린다. 플랫폼 주변에도 정감 어린 소품과 시를 적은 기와와 항아리들이 곳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황간역에서 시가 태어나 자라고 익어간다.

철로는 합쳐질 듯 평행선을 그리며 이어진다. 그 철로를 타고 리드미컬하게 덜컹대는 소리와 함께 기차가 들어온다. 달리는 방향으로 보아서는 부산으로 가는 기차다. 딱히 할 일이 없어 누가 타고 내리는지 유심히 기차를 바라본다. 플랫폼에 멈추어 선 기차가 가쁜 숨을 몰아쉬는 동안 내리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대합실에서 보았던 사람들과 언제 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서둘러 기차에 오른다. 잠시 숨을 고른 기차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황간역을 빠져나간다. 기차 달리는 소리는 듣기에 따라 소음일 수도 있고, 정감 넘치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황간역에서 듣는 기차 소리는 잊고 있었던 추억의 소리로 들린다. 시야에서 멀어지는 기차는 결국 철로 속에 파묻히고 만다. 한바탕 큰일을 치른 플랫폼은 다시 또 적막 속으로 빠져든다. 알 수 없는 아쉬움과 허전함이 밀려온다.


"손님! 커피 나왔습니다!"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커피가 나오면 차 안에 가져가 음악을 들으며 마실 생각이었다. 이젠 마음이 바뀌어 조용한 이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지 않다. 손바닥으로 전해오는 커피의 따스함이 촉촉이 젖은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준다. 창밖 너머로 보이는 마을은 카페와 마찬가지로 조용하다. 귀를 쫑긋 세워보아도 딱히 들리는 소리가 없다.


오가는 사람들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가뭄에 콩 나듯이 어쩌다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괜히 아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 목을 길게 뺀다. 마을은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추어 섰다. 마치 영화를 촬영하는 세트장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쉴 새 없이 움직이던 몸 안의 세포들은 진즉에 축 늘어졌다. 심장도 맥박도 뛰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느릿느릿 움직인다. 커피 한잔을 다 마시고도 한참을 뭉그적거리다 겨우 몸을 일으킨다.

"조용한 분위기가 좋아 커피 다 마시고 갑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