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행지 중의 한 곳이다.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도 많이 찾는 곳이라 일 년 내내 사람들이 붐빈다. 볼거리가 많은 경주이지만, 경주에 갈 때마다 꼭 들리게 되는 곳들이 있다. 이전에 보았던 곳이지만, 들르지 않으면 왠지 경주에 왔다는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 같아 당연히 들르게 된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곳이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동궁과 월지 등이다.
여행자가 경주에 갈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찾는 곳 중의 한 곳이 계림(鷄林)이다. 첨성대와 월성 사이에 있는 숲으로 신라 천 년의 세월을 보여주는 멋진 경치여서 늘 마음이 간다. 자연의 경치를 워낙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계림의 고목들은 마치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처럼 여겨져 갈 때마다 찾게 된다.
계림은 눈으로 보는 즐거움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 세월의 묵은 이야기를 품은 고목들이 딱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한 느낌과 분위기를 보여준다. 계림을 볼 때마다 허황된 생각을 하게 된다. 계림의 고목들이 저마다 품은 지난 세월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들이 애지중지하는 반려견에게 말 좀 해보라고 하는 심정과 다를 바 없다.
계림은 어느 계절에 보아도 그 계절에 어울리는 멋들어진 경치를 보여준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겠지만, 한바탕 큰 잔치를 벌이려고 화려하게 옷을 갈아입는 가을 경치가 그래도 으뜸이 아닐까 싶다. 천년이라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두세 사람이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는 굵직한 줄기는 억척스럽게 견뎌온 긴 세월을 숨김없이 보여준다.
온갖 풍상의 세월이 얹혀 있는 굵디굵은 줄기에서 뻗어나간 크고 작은 가지는 가지인지 줄기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두툼하다. 한창때, 하늘을 향해 겁 없이 뻗어나가던 그 기운이 다 빠져버렸는지 이제는 땅을 향해 허리를 수그렸다. 허리가 꺾인 가지를 보고 있으면 뜻 모를 애틋함과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오랫동안 감당한 세월과 역사의 무게가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을지 상상되지 않는다.
장은 묵을수록 맛이 깊어진다고 한다. 그것처럼 오랜 세월을 지나온 계림의 나무들이 보여주는 경치와 분위기는 깊고 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천천히 걸어 가을이 물들기 시작하는 계림을 한바퀴 돌고 나오면 잠시 천년의 세월에 갇혀 있다 빠져나오는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제 막 계림을 나왔는데 다시 또 계림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왜 그런 걸까? 계림이 안겨주는 진하디진한 여운 때문이다.
계림 뒤로는 완만하고 부드러운 곡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월성이 자리하고 있다. 좋은 곳을 보고 나왔는데,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월성이 있어 횡재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한껏 좋아진다. 월성(月城)은 신라의 궁궐이 있던 도성이었다. 생긴 모양이 반달처럼 생겨 ‘반월성’이라고도 부른다. 삼국사기에는 파사왕 22년에 성을 쌓고 금성에서 월성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성을 방어하는 해자와 함께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진 월성은 보는 이들의 눈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건 곡선이 가지고 있는 부드러움과 유연함 때문일 것이다. 또 월성 앞에 거울처럼 맑고 잔잔한 해자의 물이 있어 더욱더 그런 느낌을 준다. 지금의 해자와 월성의 모습은 그 옛날 천년 세월의 모습에 지극히 일부분이다. 말이 쉬워 천 년이지 쉽게 상상되지 않는 그 시대의 월성이 어땠을지, 또 그 시대를 살은 사람들의 모습은 어땠을지 궁금하다.
이런 역사 유적 앞에 서면 그런 의문과 궁금증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것에 관한 딱딱한 자료들은 많이 있지만,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종이에 적혀 있는 역사의 기록과는 다를 수도 있지만, 여행자가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보는 게 때론 더 즐겁고 재밌다.
머릿속에서 숨겨 놓은 상상의 날개를 펼치면 해자의 잔잔한 수면 위로 그 시대의 모습이 그려진다. 여행자는 이런 상상의 날개를 제법 쉽고 재밌게 펼쳐낸다. 특별한 재주가 있어 그런 게 아니라, 유독 역사 소설과 드라마를 좋아해 많이 보고 읽은 덕분이다. 언젠가 읽고 보았던 소설과 드라마 속의 장면들이 상상력을 펼치는 데 도움을 준다. 기록된 역사적 사실과 때론 세월의 차이도 있긴 하지만, 그게 어디 대순가. 늘 그랬던 것처럼 나 좋으면 그만이다.
집안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에게까지 가닿는다. 철없던 시절에는 망국의 왕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아쉽고 안타까웠다. 무수한 세월이 지난 지금은 이 땅의 수많은 역사를 써 내려간 선조들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선조들이 있어 오천 년 역사가 면면히 이어졌고, 이렇듯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남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