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글 쓰기
감정조차 피곤한
SNS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친구가 우리는 늙은이는 아니고 낡은이라고 했다. 아직 늙은 나이는 절대로 아니지만 그렇다고 튼튼하지 않고 너무나 허름하기에... - 트윗 글
이 말에 적극 동감했다. 무언가를 시도하기에 두려움이 없을 나이라고는 하지만 그러기에 나는 낡았다. 무언가를 시작하기가 귀찮고 피곤하다. 심지어는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그렇다. 감정은 속에 담고 있으면 기쁘기도 하지만 슬프기도 하다. 어떤 때에는 그런 감정들이 불편하거나 벅차게 느껴진다. 살짝 피곤하기까지 하다.
이런 내게
"글쓰기"가 가지는 의미가 뭘까?
내게 글쓰기란 그런 피곤하고 귀찮은 감정을 비워내는 도구일지도 모르겠다. 배우 류준열이 여행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연기를 하면 할수록 내 밑천을 본다"라고. 글쓰기로 연기와 비슷하게 표현하는 것이라 그런가 비슷하다. 글을 쓰면 쓸수록 고요해진다. 내면의 어떤 감정들을 꺼내어 쓴다. 그래서 남는 감정들이 없다. 비워진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유인 듯하다. 내 안에 있던 감정을 비워내면 새로운 감정을 채울 수 있는 무(無)의 상태가 된다. 제법 매력적인 상태이다. 요즘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적 평안 즐기기 최고.
무기력하기 쉬운
우울하기보다는 무기력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요즘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미래가 기대되지 않는다. 이런 내가 싫을 때도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이 남아있다.
극복하고 싶은가?
문득, 손을 바라본다. "손톱을 잘라야겠다." 손톱의 하얀 끝부분이 없도록 바짝 자른 손톱을 좋아한다. 이렇게 자르면 손톱 안쪽으로 이물질이 끼지 않더라. 그게 좋았다. 미세한 커피 가루들이 손톱 밑에 끼는 것도 싫었고 까매져 지저분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바짝 자르기 시작했다. 짧게 잘라 마무리된 손톱과 잘려나간 손톱들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후련하다. 정리된 손톱을 바라보다, 출발선에 선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글을 쓴다.
극복해버렸다.
꿈을 밝히고 싶은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자주 물었다.
너는 꿈이 뭐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생활 기록부에는 꼭 장래희망을 적는 칸이 있다. 초등학교 때는 모든 아이들의 장래희망을 적어 학급 게시판에 게시한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장래희망을 적어내고 그에 따른 포트폴리오를 꾸며낸다. 그리고 발표한다. "제 꿈은 이렇습니다!" 같은 반 학생들에게 발표하고, 선정된 학생은 전교생에게 발표한다. 자신의 꿈이 이거라고 딱 하나를 정해서 말해야 한다. 나는 이런 꿈을 꾸고 이렇게 진행시킬 거라고 계획까지 한다. 이상한 꿈 발표. 내 꿈인데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야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상태로 한 걸음 나아간다.
그런데 성인이 된 지금은 아무도 나에게 이런 꿈조차 뭐냐고 묻지 않는다. 길은 이미 본인들이 정해놓으셨다. '졸업하고 뭐할 거니?', '취업해야지.' 그리고 이 길에서 벗어나려면 제법 귀찮아진다. 피곤해진다. 내 꿈을 누군가에게 설득해야만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이 그때와 변함이 없다.
나의 22살은 그렇다. 대학교 3학년이지만 전공에 대해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도 않고, 이대로 4학년을 맞이하겠지.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어른이 된 것과 비슷하다. 조금은 답답하고, 때로는 섭섭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일 년에 한 번뿐인 진로 발표를 하면서 "언제 또 이런 걸 발표해보겠습니까?"라고 했던 말이 사실이 되어 버렸다. 정말로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제는 아무도 내게 꿈을 물어봐주지 않더라. 난 말해주고 싶은데. 꿈을 말해주고 싶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꿈은 제 꿈이 아니에요!" 그런데 말할 수 없다. 내가 정말 말하고 싶은 꿈을 더 정확하게는
누군가에게 내 꿈을 밝혀도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고 싶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