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도 참을 만큼 너를 사랑하니까, 프롤로그
제게 엄마가 되어 가장 좋은 점을 묻는다면 베스트 3위 안에 ‘그림책의 세계를 알게 된 것’이 들어간답니다.
사실 예전에는 그림책과 동화책의 차이도 잘 몰랐어요. 동화책은 글이 주된 서사를 이끌어가고 그림은 글을 설명해주는 삽화인 데 비해, 그림책은 그림과 글이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갑니다. 그림은 글이 하지 않는 이야기, 글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글과 다른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요.
처음엔 제게도 그림책은 ‘아이만의 책’이었습니다. 아기에게 뭔가 가르치는 교재로, 때로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장난감 정도로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과’, ‘자동차’, 이런 단어들과 단순한 그림이 있는, 카드와 책 사이 어드메쯤 있는 사물인지 책으로 아이와 함께 그림책 독서를 시작했는데요, 어느 날부터인가 그림책이 제게 말을 걸어오는 겁니다. 기껏해야 40쪽 남짓한 책이, 글자도 별로 없고 등장인물도 다람쥐, 토끼같이 말하는 동물이나 나온다고 생각한 책이 제 마음을 똑똑 두드리는 겁니다. 아름다운 그림과 쉽고 재치 넘치는 이야기로 마음의 빗장을 열더니 어느새 훅, 치고 들어오더군요.
너, 잘 살고 있니?
너, 행복하니?
너, 내가 같이 있을게.
같은 그림책을 읽으면서도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즐거움을 찾아내고, 저는 제 인생을 비추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열려 있는 척하면서도 내 생각이 옳고, 이미 나도 알 것 다 안다고 생각하는 제게 아마 누군가가 저를 가르치려고 했다면 저는 도망을 갔을지도 모릅니다.
“알아, 알아, 안다구. 나는 지금 아이를 키우느라 너무 바빠.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구!”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성장하지 않는 시간들이 흘러갔겠지요. 그림책은 아이와 웃고 즐기는 동안 스르륵 저도 모르게 삶에 대해서 참 많은 질문을 하고, 이런 건 어떠냐, 저런 삶도 있단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수박이 먹고 싶으면』(김장성 글, 유리 그림/이야기꽃)은 수박을 키우는 내용의 그림책입니다. 씨앗을 뿌리고, 잎을 솎아내고, 밭을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수박 키우기에 관한 이 짧은 이야기를 읽고 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요?
수박이 먹고 싶으면 싹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저 혼자 클 줄 알도록 때로 모르는 척해줘야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잘 자라라고 속삭여주고, 마음 아프지만 싹을 적당히 제거해줘야 남은 녀석들이 튼튼하게 잘 자란다는 것.... 무엇보다 나누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주거든요.
이 책은 읽다 보면 수박 이야기가 아닌 육아서인 것 같아요. 아니, 삶의 철학서 같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지만, 어느새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나를 믿게 만듭니다.
이런 그림책을 만나기에 가장 좋은 때가 임신 기간이랍니다. 태교 강연에서 그림책을 읽어드리면 대부분 “그림책이 이런 건 줄 몰랐어요. 엄청 수준 높네요”, “아기가 태어나면 함께 읽을래요”라고들 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천만에요. 함께 읽으려면 한참 남았어요”라고 ‘팩폭’을 합니다. 아기가 태어나고 1, 2년은 ‘사과’, ‘바나나’, 기껏 문장으로 말해봐야 ‘달님 안녕?’, 이 정도 책을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읽어야 한답니다.
게다가 이때 읽은 그림책들은 아이를 낳자마자 휘몰아치는 육아 실전에 도움이 팍팍됩니다. 그림책으로 육아현장을 시뮬레이션 하면서 적응력을 높이는 거죠. 좋은 책을 고르는 눈도 키워지고, 아이들의 눈높이도 잘 이해하게 됩니다.
아이와 양육자가 함께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참 축복인 것 같습니다.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거든요. 아이가 잠들 시간만 기다리거나, 너 때문에 내 시간을 희생한다는 억울함도 생기지 않지요. 무엇보다 그림책을 함께 읽으면서 나누는 이야기들은 육아를, 가족됨을 행복한 일로 만들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