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보 엄마라서 미안해
7세, 학교라는 벽을 만나다.
평소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꼬달이를 하원 시키고 놀이방(발달센터)을 다녀와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이 차려놓은 저녁을 같이 먹기 위해 식탁에 앉았다.
특별히 오늘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한 일도 딱히 없는데 마음속에 무거운 돌멩이 하나가 있어 성가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뒤에서 혼자 자동차 놀이를 하고 있는 꼬달이를 뒤돌아 바라봤다.
“꼬달아, 밥 먹어. 꼬달아. 밥 먹고 해, 꼬달아, 꼬달이가 좋아하는 반찬 있네.”
아이의 이름을 10번 가까이 불렀지만 아이는 반응이 없었다. 자기 놀이에만 빠져 바로 앞에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는 듯. 대꾸할 필요 따위 없다는 듯.
“꼬달아....”
나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눈은 얼어 터져 버린 수도관처럼 멈추지 않고 물을 마구 쏟아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남편의 물음에도 나는 답을 못했다. 고개를 떨구고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이름을 불렀을 때 즉각적인 반응까지는 아니어도 평소에 이렇게 아무 반응이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번 불렀을 때 쳐다도 보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2~3번 반복적으로 이름을 불러주면 얼굴이라도 쳐다본다던가 “싫어요”라고 말해준다.
아무 반응이 없이 엄마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정도는 아니다. 오늘따라 내 마음도 꼬달이의 반응도 나를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로 끌고 들어갔다.
‘우리 꼬달이를 잘 키워 낼 수 있을까?’
머릿속에는 참고 참은 수많은 근심들이 몰려오지만 아무런 대처 능력도 없는 마음 약한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꼬달이가 벌써 7살이라는 사실이 너무 숨이 막힌다. 만 5세 16년 12월생. 열흘만 늦게 태어났어도 1년이란 여유 시간을 벌었을 텐데. 아이 출생일을 계산하지 못하고 임신을 해버린 내가 한심해진다.
7살 나이라면 한글을 떼고, 수학 공부를 하고, 빠른 친구들은 영어를 시작할 나이지만 꼬달이는 예외다. 한참이나 늦는 언어 수준, 한글을 쓰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한글을 읽는 것도 아직이다. 소근육이 약해 연필 잡는 것도 가위질도 수월하지 않다.
학교라는 벽이 자꾸만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데 우린 그 벽을 지나갈 출입문도, 넘어갈 사다리도 찾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내년에 꼬달이가 학교를 가야 한다는 사실이 나에게 엄청 스트레스를 주는 모양이다. 학교는 내가 가는게 아니고 꼬달이가 가는 것인데도. 걱정과 근심은 엄마 몫이다.
폭풍이 오면 맥없이 날아갈 초가집 주인처럼 나는 무서워 벌벌 떨며 문손잡이만 붙잡고 있는 신세.
더욱이 7월에 대학병원을 가면 의사가 꼬달이에게 내릴 진단이 너무나 두려웠다. 그 진단을 받아들일 마음 준비도 아직은 부족했다.
꼬달이가 7살이 되는 동안 엄마인 나는 무엇을 했던 말인가. 내가 더 애썼더라면 지금보다 상황이 나았을까 하는 자책으로 괴로웠다.
엄마라는 굴레 속에 죄책감은 눈물이 되어 내 얼굴에 흘러내린다. 결국 남편까지 나 때문에 오만상이 되었다.
나는 스트레스가 많으면 울고 푸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늘은 비록 눈물 바람이었지만 내일은 울지 않겠다 마음을 먹어본다. 나는 눈물 많은 울보 엄마지만 꼬달이 눈에는 눈물 나면 안 되니까.
엄마라서 또 용기를 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