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톨슈 May 23. 2021

와인이 흐르고 피아노가 핀다

피노 누아를 좋아하시나요?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 (A Rainy Day in New York) 중에서 가장 로맨틱한 장면은, 바로 남자 주인공 역의 티모시 샬라메 배우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원래도 섹시하고 꽃미남의 아이콘인데, 비 내리는 뉴욕의 예쁜 거실에서, 그 길고 하얀 손가락을 반짝이며 연주를 하는 분위기란, 상상을 초월해서 아찔했다. 그의 연주는 피아노를 '친다 ‘는 행위보다는 피아노를 어루만지고, 정성껏 대하고, 꽃을 피워내는 것만 같았다. 비가 음악이 되고 목소리가 다시 비가 되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만을 가지고도 그 영화를 다시 보고 싶을 정도로, 나에게는 나른하고 달콤한 장면이었다.


그 영화를 본 뒤 잠들려고 누운 찰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영화의 잔상에 한동안 비가 오면, 피노 누아를 한 잔 따고 피아노를 피워내고 싶어 졌다. 비를 머금고 있는 영국 도시 브라이튼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꿈결처럼 스르륵 나에게 다가왔다.




 피노 누아는 빨간 적포도주를 만드는 포도 품종 중의 하나이다. 신비롭고도 살짝 옅은 붉은빛을 지녔다. 사진을 찾아보니 포도송이는 생각보다 작은데 어떤 포도알들은 조금 더 푸르른 빛이 머물고 있다. 대체로 보르고뉴의 레드와인의 양조에 사용된다고 하는 품종. 내가 피노누아를 처음 접한 것은, 열다섯- 영국의 한 작은 도시에서였다.


 내가 머물던 집의 마마와 파파는 (물론 친엄마 아빠는 아니지만 나는 그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어릴 때 보았던 영화 속 주인공 같았다. 그들은 매일 저녁 와인을 곁들여 식사를 했다. 저녁 식사에서 충분한 대화와 함께하는 와인 한두 잔은, 약과 같은 것이라고. 영롱한 붉은 액체는 그들의 뺨을 붉게 적시어 생기를 돌게 했다. 한 잔의 액체는 하루의 피로를 핑크 빛으로 물들여 괴로운 일도 없던 일처럼 만들어 준다고 했다. 어느 날 마마는 말했다. 와인 잔을 바라보며 탐이 나서 반짝이는 내 눈동자를 읽으셨던 게 틀림없다. 원한다면, 꼬맹이(나를 지칭한다)도 함께 식사할 때, 한 두 모금 정도는 마셔도 괜찮다고.


 그렇게 나의 첫 와인은 시작되었다. 상큼하고 과일 풍미가 느껴지는 피노 누아 품종의 와인들은 마마가 워낙에 좋아하셨기도 했지만, 상큼한 중학생의 호기심을 돋우기에도 최고의 액체였다. 산뜻하고 달콤하면서도 아주 약간은 알코올의 뒷맛이 나는 그런 맛. 어른의 독점품인 것만 같으면서도 포도 주스의 달큼함도 담겨있는 맛이란. 그 맛은 사춘기 여자 아이의 심장을 붉게 적시고도 남았다. 사실 피노 누아는 품종의 이름일 뿐 그때 마셨던 와인의 이름은 다른 것들이었겠지만, 별 지식이 없던 나는 늘 마마에게 맛있는 피노 누아를 오늘도 꺼낼 거냐고 물었다. 피노 피노. 어릴 적부터 재밌고 귀엽게 네이밍해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던 나는 피노누아 와인을 그렇게 불러댔다. 그것이 우리의 맛있는 피노 누아 와인에 대한 추억이 담긴 애칭이었다.


 피노 누아를 한 잔 마시고 나면, 나는 평소에 못 가지던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파파의 생일날. 서툴렀던 영어로 내가 편지에 쓸 수 있는 말은 한정적이었다. 그때는 기껏해야 하루키와 데미안만 주야장천 읽고 있을 때라, 내 안의 단어는 번역판 한국어와 특정 문화권의 어휘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늘 나에게 다정했던 파파를 기억하며 강렬히 감사의 언어를 전하고 싶던 나를 기억한다. 약사로 일하고 계셨던 파파는, 음악을 참 좋아하셨다. 어딘가 느슨한 움직임으로 늘 집안에 음악을 틀어놓고 있었고, 그는 특히 쇼팽의 ‘영웅 폴로네이즈이’를 좋아했다. 그 선율은 왜인지 피노 피노의 맛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상큼하고 다정한데 아름다웠다. 파파는 주말이면 마트에 가서 조용히 내가 좋아하던 도넛을 하나 더 집어 오셨고, 어린 마음에 이유도 없이 울어댈 때면, 쉬운 영어로 쓰인 책을 한 권 두고 가셨다. 책장 위로 그가 남겨놓은 따뜻한 마음이 어른거렸다. 영국의 날씨는 대체로 흐렸지만, 그런 순간에는 잠깐씩 마음에 해가 떴다. 그런 파파를 위해서 돈도 없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진심이 담긴 연주라고 생각했다. 머물렀던 집 1층 거실에는, 영화 속 장면처럼 하얀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생애 처음 누군가를 위한 준비한 연주. 서투르고 서투르지만 그를 위해 준비했던 손가락의 춤. 존경과 감사의 멜로디였다. 가장 간단한 버전으로 편곡되었던 ‘영웅’의 선율. 수줍어서 맘껏 피어나지 못했던 내 손가락의 꽃들은 피노 누아를 한 잔 마시고 난 뒤의 저녁이면, 만개해 흩날리는 봄날의 벚꽃처럼 자유롭게 움직였다. 그때 파파의 얼굴에도 피어난 밝은 꽃을 기억한다. 그렇게 우리는 감정을 교류했다.




 실제로 나는 피가 통한 할아버지들을 잘 겪지 못하고 자라났다. 친할아버지도 외할아버지도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거나, 내가 태어난 후 금방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함께한 기억이 거의 없다. 나도 누군가의 '강아지'가 되고 싶었었지. 그래도 나의 마음속에는, 피노 피노의 향을 머금은 영국 파파의 얼굴이 남아있다. 그를 생각하면 이내 피가 돌고 마음이 따스해진다. 흐리고 습기 가득한 비 오는 날에는, 회색 먹구름과 함께 어디선가 달콤한 와인의 향도 흐른다. 나의 영국 파파. 나의 할아버지. 나의 피노 피노.


 그가 그리워질 때면 지금도 나는 피노 피노를 한 잔 따르고, 영웅을 듣는다. 마음속에 피아노 소리가 피어나는 밤이다. 

이전 07화 물꼬기랑 쭈쭈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