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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톨슈 Jul 05. 2021

'술'아, 오늘 밤도 잘 잤니?

내 꿈 꿨지? 알라뷰

           < 요즘 부쩍 피곤하고 술이 안 들어가는 걸 보면, 또 사냥의 시간이 오고 있나 보다.>


 이 문구는 함께 글을 쓰는 친구의 글에서 발췌해 왔다. 왜인지 모르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문장이 있는데, 나는 지금까지 그녀의 글 중 이 문장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뭐랄까, 술을 자주 즐겨 마시는 자의 향이 문장에서 느껴지면서도, 뭔가 ‘사냥’이라는 거대한 행동을 해서라도 앞으로도 음주를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어서 마음에 드는 문장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의 글은 상상 속 글로, 여기서 ‘사냥’이란 구미호가 인간의 간을 사냥할 시즌이라는 의미이다. 구미호가 인간인 척 살면서 마구 술을 마셔대다 보니, 간이 약해지고 약해져서 적당한 시즌마다 새로운 인간의 간을 흡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재밌고 흥미롭다. 소재가 너무 좋아서 탐이 났다. 그리고 태어나서 여우의 마음에 이렇게 동감해본 적은 처음이다. 나도 차라리 여우가 되어서 새로운 간을 사냥해서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오로지 술이 탐이 나서 간이 탐이 난다. 그렇다. 나는 이렇게까지 술이 좋다.  


 대체 왜일까. 왜 술이 좋은 걸까. 사람들은 ‘술’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과 ‘술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나뉜다고 흔히들 말한다. 나는 굳이 말하자면 20대 때에는 ‘술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술이란 것은 물론 맛도 있고 먹으면 기분도 좋아졌지만, 의사소통 기술이 부족하고 시간은 넘쳐나던 20대 때에는 사람들과 술자리에서 게임하고, 깔깔 웃는 시간이 정말 재밌었다. 이따금은 술을 먹고 친구와 엉엉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 순간만큼은 부끄러움을 몰랐고, 다음 날의 부끄러움은 술의 탓으로 자연스럽게 돌릴 수 있었다. 


 또한 맘에 드는 남자와 좋은 무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술 만한 것이 없었다. 부끄러워하는 남자도, 혹은 내가 부끄러웠던 순간에도 술은 우리를 과감하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렇게 마음에 드는 남자를 쟁취했다. 술을 조금 마시는 남자와 사귄 적은 있는데, 술을 단 한잔도 마시지 못하는 남자와 사귄 적은 없는 것 같다. 미안하지만, 여름날 공원에서 맥주를 함께 마시는 상쾌한 기분과, 겨울날 어묵 바에 나란히 앉아 따뜻한 정종을 나누어 먹으며 노곤 노곤해지는 그런 맛을 알지 못한다면, 너무 슬플 것 같다. 


 술은 나의 피를 흐르며 나를 구성한다. 


 지금은 ‘술’ 그 자체가 좋다. 일단, 가장 큰 매력은 질릴 틈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무엇이든 완전히 정복했다고 생각하면 잘 질리는 성격인데, 술의 세계는 끝도 없고 끝도 없어서 도무지 질릴 수가 없다.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도 아직 못 마신 술이 많으며, 또 세계 어딘가에서는 나도 모르게 새로운 술이 만들어지고 있을 터였다. 예쁜 모양새와 다양한 네이밍을 즐기는 나에게 작금의 술 시장은 황홀하고도 한편으로 난감하다. 편의점은 도시에 사는 인간이라면 삼일에 한 번도 안 들어서기란 쉽지 않은 곳인데, 돌아서면 새롭고 예쁜 패키지와 재밌는 이름의 맥주가 나오곤 한다. 오늘은 한두 캔만 사야지, 하고 편의점에 들어서지만 4캔에 만원이기도 하거니와 이 맥주와 저 맥주의 조합은 해보지 않았으니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고, “앗 패키지가 바뀌었으니 하나 더!” 하면서 또 잔뜩 담고 마는 것이다. 


 전통주 시장은 홀로 조용히 바람직하게 발전하고 있다. 장인들이 연구한 조금씩 다른 전통주와 고급술들이 온갖 회사에서 나도 모르게 발 밑에 연기가 스르륵 깔리듯 어느새 출시되고 있다. 나는 그것을 맛보기 위해서 홀로 분주하다. 막걸리 전문 술집들의 존재는 또 어떠한가. 막걸리를 연거푸 몇 명 째 들이켜다 보면, 사실 두세 번째 주문까지만 맛이 기억난다. 그러면 기껏 주문하고 정복한 네다섯 번째 막걸리의 맛은 다음에 가면 어느덧 기억이 안 난다. 시킨 건 알겠는데, 맛을 모르겠다. 지나간 남자 친구의 사소한 버릇처럼 머릿속에 사라진 막걸리의 맛을 찾아 나는 오늘도 또 막걸리를 주문한다. 다 정복할 수 있으려는 찰나, 신제품의 출시 속도는 늘 나를 앞선다. 세상에 존재하는 달콤하거나 맛있는 음절을 가진 음식명들이 점점 자연스럽게 새로운 막걸리 앞에 붙는다. 유자 막걸리, 오디막걸리, 더덕 막걸리, 오미자 막걸리... 그렇게 끝없이 술맛의 새로운 세계를 탐색하기 위한 도전이 이어진다. 그래서 술값은 써도 써도 모자라다. 


 소주는 비교적 신메뉴 출시가 적은 법이지만, 소주와 먹어야지만 맛있는 음식이 있고, 또 값도 저렴하기에 도저히 한국인이라면 끊을 수 없는 종류의 술이다. 무엇보다 한 모금을 한 방에 털어놓고 짠-을 하는 기분이란 가장 행복한 순간이어서, 술자리보다 술이 좋은 나는 혼술을 할 때도 혼자 짠을 한다. 소주잔은 누가 만들었는지, 최고의 크기이다. 혼자 먹을 때도 소주잔 두 개를 준비한다. 그래도 보통 앞에 인형이라도 하나 눈 친구 삼아서 앉혀놓긴 한다. 그리고 반잔 씩 두 잔을 따른 뒤 짠-하고 입으로 소리를 내면서 잔도 부딪힌다. 두 잔다 내가 털어 넣는다. 아주 즐겁다. 그 무슨 청승이냐고 누가 말할 수도 있겠으나, 청승이란 스스로가 처량하고 지는 기분이 들어야 하는데, 나는 그 순간이 즐겁다. 혼자서도 잘 먹고 잘 노는 내가 진심이지 자랑스럽다.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이만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잘 지낼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칵테일과 양주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다. 이 두 가지는 사실 경제적 능력이 어느 정도 생기면서 탐하기 시작했다. 나의 경제력은 아직도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여전히 아는 것이 가장 적은 초보의 세계이기도 하다. 제일 처음 빠졌던 것은 진토닉이었다. 스물한 살이었던가. 어느 날, 봄베이 사파이어 진과 토닉을 섞어서 브로콜리 무침과 함께 내주는 식당에 갔었는데, 난 그 순간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그 뒤로는 살짝 느끼한 음식 혹은 아예 청량한 야채와 함께 진토닉을 즐긴다. 치즈가 들어간 찐득한 음식이나 튀김과도 잘 어울리지만, 오이든 복숭아든 상큼한 향을 가진 무얼 진토닉 안에 넣어봐도 맛과 기분이 산다. 그렇게 깔끔하게 입을 헹궈줄 수가 없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도 않는 맛이다. 


그리고 마가리타와 테킬라는 여행의 추억과 함께 더 매혹적인 기억의 술들이다. 미국에는 ‘샌 안토니오’라는 아름다운 수로를 가진 도시가 있다. 이곳에 머물러 갔던 첫날, 친구는 나를 유명한 멕시칸 식당에 데리고 갔고, 내 눈앞에 코로나리따 (마가리타에 코로나 한 병을 꽂은 거대한 칵테일)를 펼쳤다. 빨대로 쪽쪽 빨아먹는데 행복이라는 글자가 눈앞에 아름다운 필기체로 쓰였다. 양도 어마 무시한 게 마음에 쏙 들었다. 두 잔이면 술로 배를 채우기에도 충분했다. 텍사스에서는 어디를 가도 다양한 마가리타가 있었다. 뜨겁고 뜨거운 텍사스의 태양을 피해서 바에 들어서면, 프로즌 마가리타만 한 음료가 없다. 컵에 둘러진 짠 소금 알갱이들은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슬러쉬 같은 시원한 마가리타를 목구멍에 붓자면, 이과수 폭포 밑에 들어선 기분이다. 쏴쏴- 시원하게 물줄기가 목구멍과 내 몸을 적신다. 참고로 내가 태어나서 가장 시원한 개방감을 느꼈던 인생 장소가 이과수 폭포인데, 그 느낌을 술 한잔으로 잠시라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은 엄청 운이 좋은 일이다. 


 샷으로 먹는 것은 테킬라와 글렌피딕, 밸런타인 정도만 주로 먹어봤다. 아빠가 워낙에 밸런타인을 좋아하셔서 어렸을 때부터 꽤나 찬장에서 훔쳐 먹어보았는데 밸런타인은 잘 익은 고급 멜론에 부어서 숟가락으로 멜론 과육과 함께 떠먹을 때가 제일 맛있다. 테킬라는 찌르르 흘러내려가는 순간과 뒷맛이 다른 샷보다 나에게는 찰떡이다. 숙취가 심한 술이라지만, 그 정도 맛이면 용서해 줄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즐거웠던 테킬라 샷의 장면은 이렇다. 어느 날 상하이의 한 클럽에 여행을 갔다. 술 좋아하는 내게 친구는 신세계를 보여주겠노라고 했다. 테킬라 한 병을 주문했더니 스무 개의 잔과 종업원 한 분이 따라 나오셨다. 그는 조용히 우리 테이블 옆으로 무릎을 꿇고 경건한 의식을 치를 준비를 했다. 마치 과학 실험을 하듯 줄과 열을 맞춰서 투명한 잔들이 나란히 놓였다. 망설임 없이 종업원분이 모든 잔을 화려한 기술로 빠르게 채웠다. 딱 스무 잔이 나오면서 테킬라의 마지막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리고 우리에게 레몬 한 조각과 함께 한 잔씩을 건네주셨다. 원샷- 하고 나면 어느새 또 다른 잔을 내 손에 들려주시는, 마치 <모던타임스> 영화를 처음 본 순간 같은 슈퍼 자동화 장면이었다. 샷 샷 샷-샷-샷- 샷 샷 샷샷샷! 노래의 꿈이 눈앞에 실현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한 병이 사라지고 우리는 무아지경으로 무대를 휩쓸었다. 이렇다 저렇다 할 것 없이 가장 완벽하게 테킬라를 순삭 하는 방법이었다. 다른 안주도 필요 없었다.  


그리고 내가 브랜디나 각종 칵테일에 환상을 품게 된 것은 하루키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소설이나 에세이 속 아무렇지 않게 술 마시는 장면을 맛깔나게 묘사하는데, 다 맛있게 읽혔다. 본격적으로 술에 관한 글을 내고 그의 술 이야기를 분석한 책까지 나왔다. 다 이해도 못하면서 사서 읽어보고 비슷한 술을 찾아 먹어보며, 하루키 덕후스러운 나 자신에 취한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놀이이지만 혼자 글을 읽고 필사하면서 홀짝이는 위스키의 순간은 향긋하다. 이 또한 나만의 행복한 순간이다. 


 와인 이야기도 해야 하는데 한걸음에 쓰고 있는 술에 대한 글이 이렇게나 길어지고 있다는 것에 내가 가장 놀라고 있다. 아무래도 2편으로 나눠 써야겠다. 와인 중 20대 내내 내가 좋아했던 것은 피노누아나 메를롯 종류였다. 피노 누아는 영국에서 함께 살았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소개해주셨던 술이었고, 메를롯은 중학교 시절 영혼을 나눴던 친구가 동경하던 맛의 와인이었다. 와인 맛을 어마어마 알지는 못하지만, 시작에 추억과 마음이 배어있는 술들은 그렇게 나와 더 가까워진다. 요즘은 예전보다는 해산물을 더 많이 먹고 시원한 술이 좋아져서인지 화이트 종류를 본격적으로 더 탐하기 시작했다. 비싸지만 내추럴 와인도 매력이 있어서 정말 죽겠다. 라벨들은 어쩜 그리 다 한 폭의 예술작품 같은지. 하지만 난 달콤한 와인은 별로이다. 술은 어른의 쓴 맛이 섞여야 제격이다. 온도가 서서히 오르고 있는 6월 말 7월 초, 이때가 내 기억 중 가장 시원하고 씁쓸하되 시크한, 화이트 와인이 맛있는 계절이다.






 계속 마시려면 돈도 열심히 벌고 운동도 더 열심히 해야지, 하는 생각이 술 이야기를 쓰다 보니까 자꾸 든다. 그날의 기분과 습도, 그리고 안주에 맞춰 내가 딱 좋아할 술들을 집에 언제나 구비하고 있다는 것은 나의 뿌듯함이다. 


 “너네 집이 편의점이냐, 술 공장이냐”라는 친구들의 야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단아한 책장만큼 두터운 술병의 향연들이 자랑스럽다. 아침 이슬을 맞고 베란다와 냉장고에 골고루 착석하고 있는 그들의 표정은, 아침부터 살펴보아도 청아하고 정갈하다. 


 저녁 밥상 앞에 앉기 전에도 한 바퀴 돌면 늘 안부를 묻는다. 주말에는 어디 아픈 곳들은 없었는지, 내가 다 마셔버려 결근한 친구는 없는지 동태를 살핀다. 골고루 그들에게 사랑받을 기회와 채워질 기회를 나눠주는 것으로, 만개한 복지를 선사한다. 




 오늘도 나의 곁에 있어주어서 고마워요. 오늘도 나를 늘 기분 좋게 할 태세를 갖추고 있어 주어서 고마워요. 불법이 아니고 합법이어서 고마워요. 고마워 고마워. 진심이다. 


 “술아” 하고 불러본다. 


어쩐지 “희야” 나 “현” 같은 인간의 애칭처럼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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