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세벌신사
2024년 3월 10일 일요일 일기
내 짝꿍은 단벌 신사다. 10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언제나 그랬다.
1년 세계여행의 마지막 한달살기 여행지, 튀르키예 이스탄불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생활 여행자가 비행기로 국경이동을 할 경우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아마도 수하물의 무게가 아닐까 싶다. 튀르키예로 가는 저가항공을 예약한 탓인지 보통 23kg였던 수하물 허용량이 20kg로 줄어들었다. 그동안도 1kg 정도는 애교라며 약 24kg 정도 되는 캐리어 두 개를 끌고 다녔던 탓에 우리가 줄여야 하는 무게는 6-8kg 정도.
추가 비용을 내고 수하물 무게를 추가하는 것이란 우리의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어떻게든 무게를 줄여야 했다. 한국에서 캐리어에 짐을 꽉꽉 채워 넣을 때부터 이런 상황이 마주하게 될 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마주하니 무엇을 줄여야 할지 참 난감했다. '백팩에 다 욱여넣기' 작전에도 한계가 있었다. 짐의 무게를 줄일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캐리어에 가득한 짐을 째려보고 있으니 옷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 세계여행은 사계절을 모두 보내야 했기에 옷이 많았다. 특히 겨울옷의 부피와 무게가 상당했다. 겨울 옷가방을 침대 위에 풀어봤다. 대부분 가져왔지만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 투성이. 이 옷들을 다시 한국에 가져간다고 내가 입을까?
그래서 결심했다. 여행 중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은 모두 버리기로.
나는 계절이 바뀔 때면 옷 몇 벌 정도는 사는, 그래놓고 아침이면 옷장에 가득 찬 옷들 앞에서 '왜 입을 옷이 없지?'라며 종종 한숨 쉬는 그런 평범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런 내가 단벌신사의 삶을 사는 짝꿍과 결혼을 했고, 옷장 앞에서 조금도 고민하지 않는 그의 삶을 조금씩 동경하기 시작했다. 짝꿍은 소위 '교복'이라고 불리는 옷을 3세트 정도 구입해 놓고 매일 돌려 입었다. 동경은 동경일 뿐 한국에서는 짝꿍의 그런 행동을 쉽게 따라 하진 못했는데 아마도 사람 눈치를 봤기 때문이 아닐까. 친구들을 만날 때, 회사에 출근할 때, 그냥 집 앞을 외출할 때마저도 나라는 사람이 후줄근해 보이지는 않을까 타인의 시선을 의식했던 것 같다.
세계여행을 시작한 이후에는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여겨서 그런지 타인의 눈치를 보는 일이 줄었다. 핸드폰 사진첩을 스크롤해 보면 겨울엔 회색 맨투맨, 여름엔 형광 주황색 남방을 입고 찍은 사진이 사진첩의 8할을 차지한다. 나도 모르게 단벌 신사의 삶에 점점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단벌신사의 삶에 적응해 버린 나는 여행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을 다 버렸다. 물론 몇 벌은 '혹시...'라며 망설였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옷을 버리는 일에 한결 수월함을 느꼈다. (놀랍게도 짝꿍은 버릴 옷이 없었다.)
한 보따리 가득 옷을 버리며 한국에서도 단벌신사의 삶을 이어가 보기로 다짐했다. 물론 한국에 돌아가면 또 예쁜 옷이 눈에 들어올 것이고, 계절을 탓하며 옷을 사들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매일 입을 수 있는 편안한 옷인지, 나의 교복이 되어 줄 옷인지 정도는 먼저 고민해 볼 작정이다.
짝꿍처럼 단벌신사는 못돼도, 세벌신사 정도는 되어봐야지.
+ 여담으로, 짝꿍이 매일 같은 옷을 입은 여행 사진을 보내자 어머님과 형님은 제발 옷 좀 갈아입으라고 짝꿍에게 핀잔을 주셨다. 그러자 짝꿍은 옷을 갈아입는 대신 겉옷을 벗은 후 사진을 찍어 보내는 대담한 선택을 했다. 정말 멋진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