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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훈 Apr 10. 2021

우리집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ISFJ 남편이 ENTP 아내와 사는 법

아내와 나는 성격이 다르다. 우연히 하게 된 MBTI 테스트가 확인 사살을 했다. 4가지의 양극 지표가 모두 달라서 나는 ISFJ(실용적인 조력가형), 아내는 ENTP(진취적인 탐험가형)가 나왔다. MBTI 분류만큼 우리는 참 다르다.


외향형(Extraversion) vs 내향형(Introversion)

나는 아내 친구들이 집들이를 오는 날엔 보통 도망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반대로 내 친구들이 집들이에 왔을 때 아내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술 게임을 자연스레 진행하고 있었다(정작 본인은 술 못함)

감각형(Sensing) vs 직관형(iNtuition)

나는 구체적인 정보나 경험을 중시하고, 아내는 열린 사고와 추론을 즐기는 편이다. 나는 나무를, 아내는 숲을 본다고 할 수 있다.

사고형(Thinking) vs 감정형(Feeling)

아내는 누가 요즘 겪는 문제를 말했을 때 공감보다는 해결책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다. 나는 예민하고 감성이 풍부해서 그냥 지나쳐도 될 누군가의 불행까지 과도하게 슬퍼할 때가 있다.

판단형(Judging) vs 인식형(Perceiving)

항상 체계나 계획을 세우고 그걸 못 지켜서 안달 나는 나와 달리, 아내는 뭐든 그때그때 유연하게 움직이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이렇게 성향이 다른 우리가 어떻게 가까워졌을까.


취향은 비슷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슈퍼히어로물을 좋아한다. 처음 아내에게 호감이 생겼던 이유 중에 하나도 '데드풀'을 좋아한다는 점이었다(영화도 개봉하기 전이라 인지도가 아예 없었을 때부터). 지난 몇 년 동안 마블 영화의 개봉은 우리에게 절대 빠질 수 없는 이벤트였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어벤져스 2편이라 2번 보았고,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편을 갈라 보았으며, <토르: 라그나로크>는 출산 시기와 겹치자 산후조리원을 탈출해서 같이 보았다. 청첩장엔 내가 좋아하는 캡틴 아메리카와 팔콘, 아내의 데드풀을 그려 넣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영화 취향이 비슷해서 판타지나 SF를 선호하고, 만화방 데이트를 자주 다니며 서로의 덕력을 뽐냈다. 개그코드가 비슷해서 웃긴 짤은 지금도 매일같이 공유한다. 재밌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함께 위키를 파헤치고 서로의 안 똑같은 성대모사를 보며 똑같이 웃는다.


아내와 함께 했던 시간은 언제나 편안하고 즐거웠다. 결혼한 지금도 한결같다.






다만 결혼은 연애와 달랐다. 결혼은 실전이었다. 결혼과 출산 이후, 다른 성격보다 동거인으로서 다른 생활 방식이 더 문제가 되었다.


타고난 활기로 아이를 잘 보는 아내는 10점짜리(10점 만점) 엄마였고, 주부로서도 10점이었다(100점 만점) 아내는 청소와 운동을 가장 싫어한다. 처음 집에 초대받아서 갔을 때, 나는 아내가 집을 일부러 어질러 놓았다고 착각했다. '이런 나도 사랑해줄 수 있어?' 테스트인 줄 알았다. 아내는 자기소개서를 쓸 때 본인 이름 중의 '현(賢)'자를 '(집을) 어지를 현'으로 설명하고, 해리포터를 보면서도 지팡이 손짓 한 번에 정리되는 마법을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런 아내보다 조금 더 깔끔했다.


야근 후 천근만근이 된 발걸음은 귀가 후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어지러운 집을 보며 더 무거워졌다. 아내가 떡볶이를 끓여먹은 냄비는 내 손길이 닿기 전까지 며칠이고 주방에서 광합성을 하다가 가끔은 생명을 피우기도 했고, 아내의 널브러진 옷들을 보다 못해 한꺼번에 세탁기에 빨았다가 니트가 줄어들었다며 한소리를 들었다.


같이 사는 부부에게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라, 집안'일'을 하는 직장이 된다. 집안일은 갈등의 원인이 되고도 남았다. 특히 아이를 키우기 전과 후의 집안일은 차원이 달랐다. 가뜩이나 고단한 살림살이에 육아까지 더해지니 우리는 모두 정신적, 육체적으로 바닥을 찍었다. 적성에 안 맞는 집안일을 해야 하는 아내에게도, 직장인이라는 핑계로 집안일에 슬쩍 빠져 방관하는 내게도 괴로운 시절이었다.


우리집에 평화가 찾아온 건 내가 회사를 쉰 다음이었다.


아내에게 미뤘던 집안일을 내가 맡기로 했다. 요리와 설거지, 빨래, 청소를 주도하면서 아내가 겪었던 어려움을 더 공감하게 됐다. 그동안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집안일까지 도맡은 아내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미안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될까 싶어 복직한 뒤에도 회사일을 줄이고 집안일의 비중을 유지하려 애썼다.


부끄럽게도 독립하기 전까진 밥 한 번 지어본 적 없던 나지만, 자꾸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요리가 좋아졌다. 주말 메뉴를 고민하며 마트를 기웃거리고, 아내 입맛에 맞춰 청양고추나 간식거리, 각종 소스를 챙겼다. 퇴근이 빠른 날엔 가족의 저녁을 준비하고 아이를 씻겼다. 아내가 아이와 양치를 하러 가면, 나는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아내는 참 신기한 사람이다. 내가 만나본 그 누구보다 자존감이 높고, 긍정적이다. 죽을 상을 하고 끌려나가는 출근길에도 상큼한 미소로 좋은 아침을 선물해 주는 사람이다.


내가 마음의 병을 얻은 뒤, 처음에는 아내가 별로 공감을 못 해주는 것 같아 서운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병이 깊어지고 시간이 흐른 뒤에 돌아보니, 너무 공감을 잘해서 항상 같이 슬퍼했다면 오히려 더 부담이 되었을 것 같았다. 그보다는 일관된 자신의 리듬을 유지하는 편이 내게 훨씬 안정감을 주었다. 아내는 나의 슬픔을 가만히 들어주고, 내가 아플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해 주었다.


광명에서 영등포로, 영등포에서 김포로 4개의 집을 거치는 긴 시간 동안 이렇게 다른 사람과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지금도 신기하다. 나 같은 사람이랑 살아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우리는 서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다른만큼 서로에게 서툴고 앞으로도 그림처럼 아름답고 완벽한 사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것만은 분명하다. 내 인생에 가장 잘한 일은 아내를 만난 것이고 아내와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우리 아이를 낳은 것이다. 나는 오늘 밤도 앞치마를 두른다.


나비에 정신 팔린 숙희(토토) 덕분에 어깨가 다 젖은 히데코(훈훈) Ⓒ 2021. totoss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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