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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훈 Dec 07. 2020

내일 출근 못 하겠습니다

#창업 #육아 그리고 #우울증

※ 이 글은 자해/자살 등 정신질환 관련 트리거 요소를 포함합니다. 심약자의 경우, 열람 시 주의해주세요.


8월의 어느 목요일 자정이었다. 딱 금요일 하루만 버티면 주말인데,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내일도 출근하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수십 번의 밤이 흐른 뒤, 이런 일기를 쓴 지 2주가 지난 뒤였다.


이렇게 죽고 싶은데도 안 죽고 열심히 살고 있는 내가 신기하다.


공동 창업자인 동료들에게 처음으로 출근할 수 없는 사정을 이야기했다. '나도 살아야겠다. 더 늦기 전에 제대로 치료를 받아야겠다.'라고 문자를 보냈다. 수없이 되돌아온 그 밤처럼, 몇십 일을 썼다 지운 글이었다. 며칠 후에 직접 만났다. 구구절절한 나의 사연을 터놓았다. 다행히 동료들은 깊은 이해심으로 귀를 기울여 주었다. 바람처럼, 바로 쉴 수는 없었다. 10월에 개관하는 공간 준비와 채용 이슈를 마무리한 뒤, 처음으로 긴 휴가를 쓸 수 있었다. 휴가는 곧 휴직으로 이어졌고, 대외적으로는 '육아 휴직'이란 이름으로 포장했다. 다행히 반은 맞는 말이었다.






휴직 기간의 최우선 순위는 치료였다. 방법을 찾는 게 어려웠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던데, 주위엔 그 흔한 감기를 치료해 본 사람이 없었다. TV를 봐도, 서점에 가도 그렇게 환자들이 넘쳐 난다던데 이상한 일이었다. 우울증은 가히 질병계의 볼드모트였다. 나 역시 당사자가 되자마자, '우울증' 이 세 글자를 입 밖에서 꺼내기가 죽을 만큼 어려워졌다. 우울증을 앓았다는 몇몇의 이야기를 도시전설처럼 듣긴 했다. 아파서 치료받겠다는 사람을 애인이 말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병원에 가면 낫는 게 아니라 나빠진다고 생각했던 걸까. 혹은 애인이 우울증 환자라는 사실을 당사자보다 더 인정하기 싫었거나.


나을 방법을 찾는 사이, 친구들에게도 조금씩 터놓았다. 내가 좀 아프다고. 초중고를 같이 나온 동네 친구들은 예상대로 별 도움이 안 되었다. 나의 루저 감성과 가족사 등 모든 걸 공유할 수 있는 녀석들이지만, 수컷들의 공감 능력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그래도 숨기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하나둘 터놓다 보니 동지들도 만났다. 나처럼 산후 우울증을 얻어 상담받았던 친구, 나와는 다른 이유로 아팠던 친구도 있었다. 지인 중에 환자가 많다는 친구에게 좋은 병원들을 소개받기도 했다. 인터넷 검색으로는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 사이 SNS를 지웠다가 설치했다를 반복했다. SNS가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훨씬 더 좋지 않았다. 인친 혹은 페친들의 피드를 훑다 보면 금세 심난해졌다. 다들 어쩜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이 많은지.. 다들 참 재밌게 사는구나. 분명 보이는 게 다가 아님을 알면서도 괴로웠다. 나는 이제 빈 말로도 어떤 일을 '하고 싶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내 상태는 극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예전엔 그냥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이제는 그걸 넘어섰다. 당시 일기를 보면 온통 이런 말뿐이다.

"정말 너무 죽고 싶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만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죽어야 이게 다 끝이 나려나. 누가 나 좀 죽여주면 얼마나 좋을까. 어떻게 해야 끝이 날지 나도 모르겠다."

곧 있으면 두 달간의 휴직이었지만, 닿을 수 없는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졌다. 매일같이 절망했다. 차가웠던 11월의 새벽 출근길,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건 죽는 방법밖에 없는 건 아닐까.


자살은 '생각', '계획', '시도'의 3단계로 나뉜다고 한다. 생각에서 그치지 못하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5층이었는데 거기서 떨어지면 죽지는 못할 것 같았다. 어정쩡하게 살아남아 불구가 된다면, 가족에게 폐를 끼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다. 출근길엔 항상 버스가 나를 치는 상상을 했다. 뛰어들 용기는 없었으니까. 가끔 운전을 할 땐 핸들이 멋대로 움직여 인도를 향할 것 같았다. 누가 다칠까 싶어 운전대를 잡기가 무서워졌다.


우연히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기도 했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가 도와주러 왔던 날이었다. 그와 야근했던 밤, 늦어진 퇴근 시간만큼 허기가 져서 함께 편의점에 들렀다. 사무실에 야식을 펼쳐 놓고 사는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문득 이야기가 깊어졌다. 그도 역시 결혼하고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있기에 유대감이 컸던 것 같다. 나는 이런 생각까지 했다고 덜컥 털어놓았다.

"생각은 많이 했는데, 함부로 죽지도 못하겠더라고요. 애매하게 살아남으면 어떡할까 싶어서..."

놀랍게도 동료 역시 그런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자기는 언젠가 어둡고 깊은 바다에 뛰어든 적이 있다고 담담히 말했다. 다행히 실패한 이유는 체대 출신이던 그의 수영 실력 때문이었을 거라고 혼자 생각했다. 내가  힘들었네, 아니 내가  힘들었네, 왠지   없는 이야기로 밤이 깊어졌다. 새파란 형광등 아래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저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날의 컵라면과 삼각김밥은  짰다.


Ⓒ 2020. totoss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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