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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훈 Dec 20. 2020

랜선 아빠

#창업 #육아 그리고 #우울증

가을이 물든 길 위에서, 오랜만에 마주친 지인이 물었다.


어쩌면 그렇게 육아랑 창업까지 다 잘할 수 있어요?


말문이 턱 막혔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구나. 신기했다. 나는 회사와 가정 모두를 꾸리는데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힘겹게 우울증을 고백하고 나면 주변에서 그 이유를 물었다. 내가 아프다는 사실보다 왜 아픈지 이유를 털어놓는 게 더 고역이었다. 겉보기엔 괜찮은 것 같은데 왜 아프다는 건지, 아무리 설명해도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만큼 행복해야 할 이유가 많은 사람이 없어서였을까. 적어도 SNS 상에선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아빠였던 것 같다. 내 피드에는 항상 웃고 있는 아이 사진이 많았다. 그 순간엔 행복한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거저 주어지는 행복은 없었다.






창업 초기에 살던 신혼집은 15평도 안돼서, 아이와 강아지까지 네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 좁았다. 이사를 결심했다. 답이 없는 서울을 벗어나 김포로 발길을 돌렸다. 이사한 새 집은 정말 넓고 쾌적한 아파트였다. 저렴해진 집 값을 길어진 출퇴근 시간으로 지불했다. 직장인 영등포까지 편도 2시간은 기본이었다. 버스를 놓치거나 도로가 막히면 시간은 더 늘었다. 매일 4~5시간을 길바닥에 버렸다. 7시에 퇴근해도 집에 도착하면 9시가 넘었다. 그나마 정시 퇴근을 했을 때 이야기다.


회사 사업이 궤도에 오를수록 퇴근시간이 늦어졌다. 당시 준비 중인 공간을 10월에 오픈해야 했다. 공간 세팅에 각종 행사 기획, 운영위원회, 채용 등 다양한 업무가 정신없이 쏟아졌다. 나는 그저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인데,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바빴다. 싱글이었을 때의 '바쁨'은 공기처럼 흔하고 당연할 뿐이었지만, 가정이 생긴 후의 '바쁨'은 중력처럼 나를 짓눌렀다. 나는 주말에도 출근하거나 사무실이 아닌 어디서든 일을 계속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다른 선택지가 없어 보였다.


수북이 쌓인 일들이 주 40시간을 삐져나와, 밤과 주말을 게걸스레 먹어 치웠다. 월화수목금 5일을 합쳐서 아이를 보는 시간이 30분도 안 되는 때가 많았다. 거듭된 야근으로 잠자는 아이 뒤통수만 관찰하는 일상이었다. 그 사이 아이는 웃음이 많아졌고, 뒤집기를 성공했고, 이유식을 시작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아내의 인스타그램으로 확인했다. 나는 랜선 아빠였다.


세상 밝고 뭐든 다 이해해줄 것만 같던 아내도 언제나 그럴 순 없었다. 크고 작은 부부싸움이 많아졌다.


"나 이번 주 토요일 저녁에 약속 있어."

느지막이 퇴근한 내게 아내가 말했다. 그 시간에 내가 애를 봐야 한다는 소리였다. 여느 주말처럼 이번 주도 혼자 나가서 일할 계획이던 나는 무심결에 짜증을 냈다. 아내가 당황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

"오빠는 원래 주 6일 일하는 거야? 항상 주말에 일하는 게 너무 당연한 듯이 이야기하잖아."

문득 정신이 들었다. 절대 당연하지 않은 걸,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구나. 그러면 안되는데, 그렇게 하고 있었다. 내가 살려고 한 인생은 이게 아닌데. 아이를 하루에 5분도 보지 못한다면 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누구를 탓할 순 없었다. 결국 내가 선택한 삶이었다.






구겨진 담배 개비처럼 버스에 실려가는 퇴근길, 아내가 카톡을 보냈다. 사진 속의 아내와 아이, 강아지가 함께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집에서도 깊어지는 소외감의 정체를 눈으로 확인했다. 그건 나 없이도 완벽한 가족사진이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게 평생 꿈이라고 수십 년을 말해온 나는, 간밤에 꾼 꿈처럼 집에서 희미한 존재였다.


'나는 없어도 되지 않을까. 우리 가족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 내가 없는 게 낫지 않을까. 보험도 착실히 들어 놓았으니 괜찮을 거야. 차라리 사고로 죽어서 보험금이라도 많이 나오면 살림도 훨씬 나아지고 좋지 않을까.'


나의 죽음은 그저 몇 자리의 숫자로밖에 잡히지 않았다. 아빠 없는 아이, 남편 없는 아내가 될 가족의 남은 삶은 미처 그려보지 못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오늘도 멀었다.


Ⓒ 2020. totoss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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