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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훈 Dec 20. 2020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가 아니다

#창업 #육아 그리고 #우울증

정신과.


정상일 땐 한 번도 눈에 띈 적 없었지만, 알고 보니 패스트푸드점 만큼 흔한 곳이었다. 평생 갈 일 없을 거라고 생각한 그곳에 가야 했다. 이러다 정말 죽을수도 있겠다 싶었으니까. 힘든 결심을 했지만 적지 않은 진료 비용이 걸렸다. 병원에 의료 기록이 남는다는 거부감도 발길을 잡았다. 결국 병원 대신 상담센터라는 대안을 찾았다. 대부분 몇 달 정도 예약이 가득 찬 상태여서 일단 대기를 걸었다.


한 달쯤 지나서였을까. 생각보다 빨리 순번이 돌아온 곳에서, 상담을 시작했다. 서울시에서 위탁 운영하는 센터에서 4~8회 진행하는 무료 상담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눴다. 다행히 선생님이 나와 잘 맞았다. 나처럼 결혼한 여성분이셨고, 정신과 상담 특유의 중립적인 선을 지키면서도, 내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반응해주셨다. 


상담을 하면서 주로 나를 짓누르는 짐을 털어놓았다. 집에서는 가장이라는 책임, 회사에서는 이사진이라는 책임이었다. 특히 한 프로젝트의 경우, 혼자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 컸다. 디자인 가이드를 만드는 작은 용역 사업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팀원 모두가 자기 할 일 쳐내기도 바쁜 상황이었고, 프로젝트의 규모 상 누군가 거들기도 애매했다. 내가 시작한 일이었기에 내가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에서든, 회사에서든 ◯◯ 씨를 쫓아다니는 게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여러모로 부담이 큰 상황인데, 그 프로젝트라도 다른 동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잘 모르겠다고 선생님께 말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미 내 상황을 아는 동료들에게 여러모로 빚을 지고 있는데 그것까지 힘을 빌려야 한다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 선생님의 말처럼 조력자가 더 필요했지만, 작은 조직에겐 사치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누가 나를 더 도와줄 수 있겠어. 지레짐작했고, 손을 벌리지 못했다.


 




집에서도 오롯이 혼자였다. 특히 가계부 담당으로서, 살림 걱정을 독차지했다. 우리 집은 사실상 외벌이였는데, 창업이라는 리스크가 컸다. 월급이 몇 번이나 밀렸다. 직원 월급은 한 번도 밀리지 않은 게 위안이었다.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달이 이어졌다. 경기도로 이사하면서 딸려오는 지출이 많았는데, 그걸 다 메꾸기엔 내 월급이 너무 작고 귀여웠다.


예술 전공자인 아내는 출산 후 프리랜서가 되었다. 방송국 조연출 경력을 살려 유튜브를 시작했고 아동복 마켓도 병행했다. 둘 다 큰돈은 되지 않았다. 평생 직장인으로만 산 나는, 고정급이 없는 프리랜서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다.


'차라리 저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하면 시급을 더 받을 텐데….'
'차라리 저 시간에 집안일을 더 하면 집이라도 좀 깨끗할 텐데….'

아내에 대한 원망이 쌓였다. 아내가 현실은 외면한 채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사람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윽고 원망은 자기혐오와 뒤섞였다. 모든 문제를 내 탓으로 돌리는 기질이 발동했다. 그래, 내가 돈을 더 벌고, 내가 더 집안일을 하면 될 텐데 나는 왜 그렇게 못할까. 매일 밤 계산기를 두드려도 답 없는 현실에 무릎을 꿇었다. 신혼의 행복은 잠결에 받은 전화처럼 희미해졌다. 실체 없는 불안감에 잠을 못 이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과장되고 합쳐져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결혼을 잘못한 게 아닐까. 나라는 사람은 결혼을 하면 안 되는데 한 게 아닐까.'

근거 없는 망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단 한 번이라도 이 생각들에 이의를 제기했다면 어땠을까?

'그건 그냥 잠깐의 생각일 뿐이야. 사소한 걱정들을 그렇게 사실처럼 받아들일 필요 없어.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널 도와줄 사람도 어디에나 있잖아. 지금 네 곁을 지키는 가족처럼.'


나는 우울증과의 싸움에서 매일 패배했다. '우울증 극복'은 내가 그동안 가진 목표와는 결이 달랐다. 더 나은 나, 더 높은 곳 혹은 더 많은 무언가를 추구하는 목표 같은 게 아니었다. 나는 원래의 내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단지 기본값인 0이 되기 위해, 남들은 상상도 못 할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예전엔 남들처럼 평범해지는 게 제일 두려웠는데, 이젠 평범해지는 게 꿈이 되었다. 






흔히들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일컫는다. 감기처럼 누구나 쉽게 걸릴 수 있는 병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병을 오래 앓은 지금, 생각이 달라졌다. 사람이 감기로도 이렇게 아플 수가 있을까? 감기로 죽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까? 나는 차라리 <우울증 탈출>의 저자 타나카 케이이치의 말에 더 동의한다.



"우울증은 마음의 암이다. 우울증은 내버려 두면 죽음에 이르게 되는 병입니다. '자살'이란 마음의 암의 증상 중 하나고, 그로 인한 죽음은 '그 사람의 마음의 수명이었다'고 생각해야 해요."



우울증은 감기 따위가 아니다. 감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없다. 우울증을 마음의 암으로 여긴다면, 많은 것이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출근하지 못하거나, 세상과의 접촉을 끊는 일, 오랜 기간 치료를 받고 입원해야 하는 일, 심지어 절망 속에 목숨을 끊는 일조차.


나는 우울증이라는 터널에 떠밀려 온 뒤 줄곧 출구를 찾아 헤맸다. 터널만 지나면 될 줄 알았는데 그 터널이 너무 길고 어두웠다. 반드시 끝이 있다는 희망 뒤엔 고통이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나는 너무나도 간절히 죽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길 바라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 순간에도, 누구보다 살고 싶었는지 모른다.


Ⓒ 2020. totoss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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