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by J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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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한 첫날이었다. 왕복 세 시간, 자동차 대신 대중교통을 택했다.

새벽 어스름, 아내와 딸이 깊은 잠에 들어 있을 때 집을 나섰다.

좌석제 버스에서 잠시 눈을 붙였고, 출근 후 피곤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회사에 도착해 인사팀의 도움을 받아 돌아보았다.

면접날 내게 주로 질문을 던졌던 이가 바로 사업부 전무님이었다.

옆에 있었던 분은 개발실 실장님. 그리고 또 한 사람, 냉담한 얼굴의 디자인파트 차장님이었다.

이 회사에 디자인팀은 따로 없었다.

개발 부서 내 한 파트로 속해 있었고, 그 파트는 모두 출판 편집 디자이너들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회사 최초의 제품 디자이너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에 제품디자인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설계팀도 없었다.

교구 관련 생산은 책을 양산하고 물류를 담당하던 제작팀에서 그저 곁다리처럼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아 교육팀, 영어개발팀, 각자 필요한 교구를 만들고 싶어 했다. 친환경 교구였다.

출판사라는 이름 아래 교육 업계에서 만들어지는 제품은 완성도가 낮았다.

디자인보다 책 제작에 집중해왔기에 노하우도, 이해도도 없었다.

필요한 교구는 해외 완구 회사와 협업하거나 사입하는 게 전부였다.


회사가 바라보는 디자인의 기준은 그저 단순한 모양새였다.

어느 정도의 편안함을 추구한다면 야 부담 없이 일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제대로 손을 댄다면 끝이 없을 듯한 길이 시작될 게 뻔했다.


개발실 성비는 여성 90퍼센트였다. 디자인 쪽에서는 편집디자인 파트에 남자 디자이너 한 명, 그리고 나.

개발실에서는 그런 내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각 팀은 회의 시간마다 나를 포섭하려 들었다.

팀별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내게 기대는 모양새였다.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나자, 나는 내 자리부터 만들어야 함을 깨달았다.

컴퓨터 장비는 지원받을 수 있었지만 그 외의 것들은 여의치 않았다.

따로 작업 공간이 없어 편집디자이너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그들도 자신의 일에 파묻혀 있어 나와 마주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며칠 후, 개발실 실장님과 디자이너 전원이 모이는 회의가 있었다. 나는 처음 참석하는 자리였다.

오후 다섯 시에 시작된 회의. 실장님 방에 디자이너 열 명 남짓이 들어갔다.

담배 연기로 가득한 방, 사람들은 각자 두꺼운 프린트물을 들고 있었다.


회의는 출판사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글에 대한 집착. 디자이너조차 작문에 능했다.

회의록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두께였다. 회사의 임원, 회장님까지도 사전에 이 회의 자료를 검토한다 들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놓치지 않고 읽어보는 이들.


나는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다. IDEO와의 협업 이후 간결한 회의에 익숙해져 있었던 터였다.

실장님은 회의 초반부터 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내게 예전에 제작된 교구를 내밀며 제작 원가를 산출해 보라 했다.

양산 수량도, 공장의 컨디션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렵다는 답을 내놓았다.


정적이 흘렀다. 디자이너들은 내 눈치를 보며 몸을 움츠렸다.

실장님은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깊은 연기를 내뿜으며 답답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날 회의는 세 시간 넘게 이어졌다. 실장님이 내게 묻는 질문들은 전부 생산과 원가와 관련된 것이었다.

제품디자이너가 아닌 제작팀의 일원처럼 느껴졌다.


"이 회사도 쉽지 않겠구나."


마음 한구석에서 탄식이 스쳤다.

나의 시작은 어쩌면, 더 깊은 어둠으로 가는 문턱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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