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출장이 끝난 뒤, 우리는 변화 속으로 들어갔다.
출장 전에 만들어진 신사업부는 여전히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아이템으로 사업을 진행해야 할지, 매일 회의가 이어졌다. 교육 사업 부문은 이미 개발이 끝나 마케팅팀이 세일즈에 집중하고 있었고, 우리는 할 일이 많지 않았다. 전략 기획이나 마케팅팀이 사업성을 검토한 후, 개발이 필요하면 우리와 협의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협의 요청은 오지 않았고, 우리는 기다렸다.
신사업팀은 주말도 없이 미팅을 이어갔다. 시장 조사를 이유로 나와 담당자는 독일 뉘른베르크, 프랑크푸르트, 퀼른을 다시 돌았고, 갑작스레 상하이를 다녀오기도 했다. 도쿄 출장 요청도 있었다. 다들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무엇이라도 잡아야 한다는 듯, 무작정 움직였다. 나는 출장을 갈 때마다 어떤 브랜드가 있는지, 제품의 특성이 무엇인지 조사하고 정리했다. 하지만 신사업팀은 영유아 제품 분야에 대한 경험도 없었고, 직접 디자인을 해본 적도 없었다. 방향을 찾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신사업팀 팀장은 나와 우리 팀을 자기 팀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하지만 내 경력과 회사 내 입지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신사업뿐만 아니라 교육 사업의 제품 디자인도 함께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디자인이 필요하면 요청하면 될 텐데, 기획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회장님이 이 신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그 때문에 부사장님과 신사업팀 팀장을 견제하는 임원들이 있었다는 걸. 사업이 성공하기를 바라기보다는 실패하기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특히 총무팀 담당 임원은 비용 집행을 이유로 부사장님을 강하게 압박했다. 심지어 새벽에 진행된 외주 공장 미팅에도 따라왔다. 단순한 견제가 아니라 감시 같았다. 부사장님은 이런 상황을 감수하면서도 신사업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일찍 출근하는 나는 여느 때처럼 회사 앞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신 뒤 사무실로 올라갔다. 하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책상이 비어 있었고, 익숙한 사람들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곧 부사장님이 우리 팀원들을 호출했다.
그의 방에 들어섰을 때, 몇몇 다른 부서 사람들도 함께 있었다. 부사장님은 담담한 얼굴로 작별을 고했다.
퇴사.
우리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일이 지지부진하다는 이유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임원들의 견제 때문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 회사를 떠나게 되다니. 다음은 어떻게 될까. 앞으로 이 사업은 어떻게 되는 걸까. 막막함이 밀려왔다.
신사업팀의 동요도 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상무이사가 신사업팀 본부장으로 부임했다. 회장님의 조카사위. 전자회사 해외영업을 했던 사람이었다. 신사업팀, 교육 마케팅팀과의 코드는 전혀 맞지 않았다. 일을 몰랐고, 부사장님처럼 공부하려는 모습도 없었다. 팀원들은 무기력해졌다. 결국 신사업팀 팀장은 회사를 떠났다. 그 뒤를 따라 교육 마케팅 팀장과 팀원들도 퇴사했다.
나는 새 본부장과 직접적으로 부딪칠 일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남은 사람들도 하나둘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본부장은 다른 사업부로 이동했다.
그 뒤, 신사업팀과 교육 사업부, 그리고 우리 디자이너들까지 하나로 묶여 새로운 본부가 만들어졌다. 본부장으로 온 사람은 전혀 다른 부서에서 온 부장이었다. 개발 과정도, 제품 히스토리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온 후, 영업 부서에서 간섭하기 시작했다.
마케팅팀은 이리저리 불려 다녔다. 나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특히 회장님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와 우리 팀원들의 자리도 사무실 한쪽, 구석의 협소한 공간으로 밀려났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조차 답답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자주 회사 앞 스타벅스로 나와 일을 했다.
본부장은 나의 퇴사를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내가 요청하는 것들은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영업 임원 한 명이 말도 안 되는 판촉 관련 일을 우리에게 시키려 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가 없었으면 우리 팀원들은 본업과 무관한 허드렛일에 시간을 허비했을 것이다. 그들은 디자이너는 분야와 상관없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청업체처럼 부려도 된다고 여겼다.
이건 회사를 나가라는 뜻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건 보통 회사가 어려워졌을 때다. 특히 유능한 임원이 퇴사한 뒤 벌어지는 혼란. 회장님은 이 사태를 예측하지 못했던 걸까.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내가 만든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결심했다.
그해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 회사를 떠나기로.
팀원들에게는 미안했지만,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무지한 사람들에게 내 에너지를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사직서를 제출하자, 회사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회장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붙잡을 명분은 없었다. 그들은 내가 왜 떠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본부장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앞으로 이런 걸 해보자.”
헛웃음이 났다. 전에 검토했다가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했던 아이템이었다. 그는 그걸 아이디어라고 들고 왔다. 그리고 어떻게 진행할지, 어떻게 판매할지도 몰랐다.
나는 차갑게 반응했다.
내가 떠나는 날, 팀원들은 눈물을 보였다. 서로를 다독였다.
나는 20년 가까이 회사 생활을 했고, 이곳에서는 4년 7개월을 보냈다. 가장 힘들게 퇴사했던 곳이었다.
바닥부터 브랜드를 만들고, 제품을 개발하고, 시장 조사를 하고, 해외를 다니고, 주말도 없이 일했던 곳. 지각 한 번 없이 새벽 출근을 했던 곳. 내 젊은 시절을 쏟아부었던 곳.
그 모든 것이 무너졌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회사에서는 내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때 내가 만든 제품들은 여전히 잘 팔리고 있다.
나는 국내에서 친환경 디자인과 영유아 제품 디자인을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디자이너가 되었다.
하지만 내 노하우를 전수할 후배는 없다.
영유아 제품 디자인은 난이도가 높고,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제 나는 노인과 약자를 위한 디자인을 한다.
사람이 가장 약한 시기에 사용하는 제품을 디자인한 경험은 노인을 위한 디자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제야 깨닫는다.
그때의 노력들이 이렇게 보상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쉬움을 남긴 채, 새로운 도전을 향해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