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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식한 어린이

퍼포먼스가 끝난 자리엔 너덜너덜해진 정신과 육체만 남아 널브러져 있다.

by Boradbury

형님, 애들 오늘 또 학교 못 갔어요.

올케의 목소리가 이미 너덜너덜하다. 애들 침대 곁에 태아 자세로 웅크리고 누워 밤새 더듬이를 세웠을 터다. 사계절 중 삼계절이 습기 머금은 추위가 스멀스멀 밑바닥서부터 올라오는 시애틀 날씨는 감기 바이러스의 온상지가 된다. 그 중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과 노인들, 지병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좋은 먹잇감, 숙주가 되기 십상이다. 특히 올봄은 잠시 얼굴을 들이미는, 며칠 안 되는 맑은 날조차 아침저녁으로 찬 공기가 잽을 날린다. 방심하는 순간 바이러스가 벽과 문 사이에 발을 들이밀며 집 안으로 침투한다.

코비드 이후, 그들은 더 강력한 무기로 재무장했다. 구식 무기들을 신식 무기로 다 갈아치우고 치명타를 날릴 비장의 무기까지 꽉꽉 채워 단단히 준비했다. 꼰대처럼 말하자면, ‘라떼’는 특별한 병이 아니라면 그저 하룻밤 정도 열이 올랐다가 콧물 조금, 기침 약간을 뿌려 넣은 살짝 칼칼한 국물 같았는데 요즘 젠지(Gen -Z)의 바이러스는, 당연히 이쯤이면 다 나아야 하는 거 아니야? 하면 왜요? 라고 하듯 캡사이신 매운맛을 마구 뿌려댄다. 그러다 보니 의사도 요즘 바이러스는 특별한 답이 없다며 증상에 따른 약만 약국에서 사다가 복용하라고 한다. 고열과 통증보다 가슴 답답함으로 먼저 사망 선고를 받을 지경이다.

나도 몇 주 전, 그들에게 어퍼컷, 스트레이트, 훅으로 때려 맞고 일주일을 통째로 반납한 채 침대에 누워 지냈다. 심지어 회복하는 데만도 또 일주일을 써야 했다. 그들은 나를 과대평가했다. 중년에 운동도 하지 않는 여자가 뭐 그리 강해 보인다고 이렇게나 두들겨 패는지. 영화 <친구>의 명대사처럼, 고마해라, 마이 무긋다 아이가,를 수도 없이 중얼거렸는데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다 죽어갈 때쯤에서 난 또 다른 영화 <해바라기>의 명대사를 날렸다.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첫날은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통증에, 두 번째 날엔 하루 종일 부들부들 떨릴 정도의 고열로, 세 번째 날부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콧물이 줄줄 흘렀다. 그뿐만 아니라 네 번째 날엔 속을 게워 낼 정도의 기침이 밤낮으로 계속됐고, 다섯 번째 날부턴 가래가 끓어 가슴께를 뜯어내고 싶었다. 거기에 더해 손발, 코끝이 얼음을 문댄 것처럼 연신 냉기를 뿜어냈다. 바이러스의 종합 예술이 내 몸을 통해 화려하게 승화된다. 퍼포먼스가 끝난 자리엔 너덜너덜해진 정신과 육체만 남아 널브러져 있다.

일반 감기, 독감, 코비드, 그 외에 알 수 없는 바이러스. 그것들의 경계는 요즘 매우 모호하다. 코비드 증세 같은데 테스트해 보면 음성이 나오기도 하고, 감기 같은데 의사는 알레르기라고 하기도 한다. 독감은 감기와 코비드 사이에서 발을 이쪽저쪽에 하나씩 걸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감기래? 아니면 독감? 뉴스에서 말하는 신종 코비드인가? 물으면 이렇게 답이 돌아온다. 글쎄, 이젠 나도 잘 모르겠어. 역시 요즘 바이러스는 위장술에도 능하다.

조카들은 하나가 먼저 아프다가 다른 하나가 옮고, 또다시 나을 때가 되면 처음 아이가 재차 아프길 반복했다. 그러는 새에 바이러스는 엄마, 아빠로 옮겨 다니기도 했다. 학교에 매일 아침 아파서 결석한다고 음성 메시지를 남기고 다른 사람에게 옮길까 봐 외출도 당분간 금한다. 약국에서 사 온 약이 식탁에 군대처럼 열 맞춰 서 있다. 해열제 두 종류, 기침약, 콧물약, 비타민. 신종 무기를 장착한 바이러스에 비해 우리의 무기들은 너무 구식이다. 뉴스를 보니 우리 쪽 신종 무기를 만드는 제약회사들은 그들의 속도전에 한참 뒤처져있다. 아직 적군의 정체도 밝히지 못했는데 또 다른 적군이 계속 나오고, 겨우 하나를 잡으면 그들은 벌써 몇 수나 앞서 나가고 있으니 당연하다. 거기에 전문가들은 앞으로 변형된 신종 바이러스들이 더 많이 생겨날 거라고 미리 겁을 주기까지 한다. 티브이 화면을 끄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일주일을 꼬박 아프고 나서야 조카들은 학교에 복귀했다. 그리고 우리 집으로 첫 외출을 나왔다. 심하게 앓고 난 조카들의 볼이 쏙 들어가 제법 큰 아이처럼 보인다. 애들은 아프고 나면 또 쑥 크잖아. 입버릇처럼 엄마들이 하는 말을 나도 뱉어본다. 하지만 그건 안쓰러운 마음을 토닥이는 일종의 위안이 아니었을까. 조카의 동그랗고 큰 눈이 오늘따라 볼록렌즈를 낀 것처럼 툭 튀어나와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며 난 새로운 위안의 말을 찾아 건넸다. 식식(sick sick)한 어린이네. 자꾸 아픈 조카들이 씩씩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씩씩하기를 바라는 고모의 마음이랄까.

올케는 그 말뜻을 알고 웃었지만, 조카들은 ‘씩씩한’의 약한 말 정도로 이해한 듯 없는 힘을 더 끌어내어 열심히 거실을 뛰기 시작했다. 티브이에선 또 새로운 소식을 전한다. 홍콩과 광둥성 등 중화권에서 신종 바이러스가 발견됐는데 치사율이 칠십오 프로나 된다는 것과 그 바이러스가 시애틀과 엘에이, 뉴욕 같은 큰 미국 도시 공항으로도 들어온 것이 확인됐다는 뉴스다. 올케와 비타민을 나눠 먹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하루에 두 개씩 먹으라는 비타민 젤리를 다섯 개나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식식, 아니 씩씩한 미래를 위하여! 비타민 젤리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며 불쌍한 우리의 몸뚱이에 건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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