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멈춘 순간에 찾아온 가장 작은 움직임
퇴사 수속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손에는 종이 몇 장이 남았다.
퇴직확인서, 실업급여 신청서, 그리고 미련.
현관문을 닫는 순간,
내 하루가 멈춘 듯 고요해졌다.
그동안 늘 아침마다 맞던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카톡 소리도, 회의 알림도 없었다.
처음 며칠은 그 침묵이 낯설었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렇게 공허할 줄은 몰랐다.
“이제 진짜 쉬어야 하는데.”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은 여전히 분주했다.
퇴사한 지 일주일째,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남편은 출근하고,
나는 조용한 집 안을 서성였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보며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일을 하지 않으니 하루가 너무 길었다.
그래서 조금씩 기록을 다시 시작했다.
그동안 쌓인 감정들을 글로 풀어내니
조금은 숨이 트였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회사원’이 아니라 ‘나’로 돌아갈 수 있었다.
며칠 전에는 오복이의 초음파를 보러 갔다.
의사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아기, 아주 건강하게 잘 크고 있어요.”
그 한마디에 마음이 조금 녹았다.
세상 모든 게 멈춘 것 같았지만
배 속에서는 여전히 누군가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래, 나는 멈춘 게 아니야.
잠시 숨 고르는 중일뿐이야.’
집에만 있으면 무기력해진다는 글들을 보며
나 역시 그렇게 될 것 같아
집 근처 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산모교실에 참여했다.
나보다 배가 훨씬 많이 나온,
출산을 앞둔 산모들을 보니 신기하기도 했다.
모든 게 처음이라 낯설고 서툴렀지만
배움보다 더 큰 ‘안도감’을 얻었다.
‘나만 모르는 게 아니구나.’
‘다들 이렇게 하나씩 익숙해지는구나.’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이란
이렇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시작되는 것 같았다.
20주가 될 무렵부터
엷은 태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배에서 ‘툭, 툭.’
이게 정말 태동일까,
아니면 변비로 인한 가스일까.
남편은 계속 가스라고 우겼지만
나만 느끼는 감정이 있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 이건 아기구나’ 하고
본능처럼 알 수 있었다.
처음 태동을 느끼면 무섭다고들 했는데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신기해서
한참을 배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툭, 툭…
아기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거울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이제는 임산부 옷을 입어야 하나?”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배를 보며
나는 새삼 깨달았다.
내 몸도, 감정도, 하루의 속도도
조금씩 다른 리듬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멈춰 선 줄만 알았던 내 시간은,
사실 조용히 ‘변화’를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