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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아 Dec 01. 2021

눈을 싫어하는 남자


재우(N)


여기 전혀 다른 겨울의 풍경을 담은 두 그림이 있습니다. 한쪽 그림은 화면이 꽉 차 있고 활기가 넘쳐흐릅니다. 스케이트와 썰매를 비롯해 얼어붙은 운하 위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여흥이 담겨있. 스케이트 날의 마찰음, 아이들의 웃음소리, 까마귀와 철새들의 울음소리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이 놀라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네덜란드의 재 화가였습니다. 그가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듣고 말했다는 것을 이제는 전세계가 알게되었.


헨드릭 아베르캄프의 '겨울 풍경'


반면 옆에 걸린 그림은 사방이 구름과 안개에 휩싸여 여백으로 가득. 생기라고는 어두운 초록빛을 띄는 늘푸른 나무에서 겨우 전해지는데, 앞의 그림에서 잎 하나 없는 앙상한 나무가 담겼던 것과 대조적이죠. 이 그림에 담긴 것은 오직 영원을 상징하는 저 나무와 멀리 보이는 교회 그리고 바위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발짝 가까이 들여다보시겠어요?


나무 밑 바위에 기대어 기도를 올리는 남자가 보이실 겁니다. 자신의 두 목발까지 내팽개치고 무슨 기도를 올리는 건지. 그의 사연이 궁금해지는 작품입니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겨울 풍경'


여러분에게 겨울은 어떤 계절인가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과 어울리며 회포를 푸는 시간인가요? 홀로 내면으로 잠겨들어 죽음과 생명을 떠올려보는 시간인가요?


어느 쪽이든.

새하얀 눈밭은 당신이 지닌 색깔을 끌어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당신이 지닌 영혼의 색깔을 아직 모르겠다면

두 그림 가운데 어느 그림에 끌리느냐가

그 힌트가 되어줄지 모릅니다.





퍼스널 도슨트 제이

첫 번째

눈을 싫어하는 남자





책상 끝에 위태롭게 걸 인쇄기 한 대 서울 시립 미술관, 도쿄 국립 신미술관, 베를린 그로피우스 바우 전시 품목이 찍힌 문서들을 뱉어내고 있. 창문으로 들이친 햇살 이 더미로 설원처럼 변 사무실 바닥을 다가  엎드린 남자의 얼굴까지 닿았지만, 남자는 깨어날 줄 모른다.


그의 머리맡을 파수병처럼 지키던 머그잔에서 마지막 김이 피어올라 흩어질 때, 사무실 한쪽 문이 벌컥 열리 장신의 여자가 들어다. 머리와 어깨 위에 쌓인 눈을 요란하게 털어내던 그녀 발치에 걸리는 종이들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지푸렸다. 짧고 검은 머리에 하얀 바지, 무릎까지 오는 갈색 부츠 때문인지 그녀는 당장이라도 말에 오를 매서운 기수처럼 보다.


많게 잡아야 서른 쯤으로 보이는 그녀는 재인 도슨트 에이전시의 대표 유재인이었다. 늘 한 발짝 멀리 내다보는 전시 업계의 뛰어난 기수로서 그녀의 경주마들, 즉 한국의 내로라하는 유능한 도슨트들이 이 사무소에서 그녀가 제시하는 방향대로 잘 달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인이 모든 동료들에게 백 퍼센트 만족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특히 친동생이면서 날카로운 분석력과 부드러운 언변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재우는  평판과 상관없이 그녀에게 있어 늘 한계를 시험하는 존재이자 아픈 손가락이었다. 난장판이 된 사무실 둘러보던 재인은 인쇄물 뭉치를 동생의 머리맡에 쿵 소리가 나도록 떨어트렸다. 재우가 움찔거리며 깨어났다.


"사무실에서 투숙하지 말라고 했지. 여기가 고시원인 줄 알아?"


뻑뻑해진 눈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재우가 신음하듯 말했다.


"줘. 김... 누군지 하는 고객이 예약 시간보다 늦게 테이트모던에서 접속했거든."


"어려운 외국 작가 이름잘만 외우면서 고객 이름은 왜 기억 못하는데."


어깨를 으쓱거리는 재우의 품에 인은 머그잔들을 몰아주다.


"5분 뒤에 베를린 쪽이랑 미팅이야. 컵 닦는 김에 얼굴도 좀 닦고 회의실로 들어와."

 

재우가 한숨을 내쉬며 책상손으로 밀자 그가 앉아있던 휠체어가 스르륵 뒤로 밀려났다. 이어서 그는 무릎 담요 위에 머그잔들을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개수대 앞으로 바퀴를 굴렸다. 그는 선천적으로 다리를 쓸 수 없었지만 그 사실에 대해 비관한 적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한번 정...


남매는 여유로운 환경에서 유년기를 어려움 없이 보냈다. 언제나 그들을 태워주는 운전기사가 있었고, 휠체어를 위한 시설이 잘 갖추어진 학교를 다녔다. 꼭 한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재우는 세상이라는 허허벌판에서 휠체어로 맞닥뜨리게 되는 심각한 위기들을 마주했고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맛보았다. 자신을 감싸주던 방벽이 사라진 뒤에야 그 방벽이 보여주었던 세상의 빛이 실제 빛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공격과 방어 중에 방어를 선택했고, 자신만의 껍질을 만들어 그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가 택한 첫 번째 껍질이 바로 그림의 세계였다.


한편 또래들보다 일찍 성숙한 재인은 남매가 공생하며 생계를 이어갈 타개책을 일찍부터 모색했다. 둘은 한 배에 타고 있었고 선장은 언제나 재인이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전 세계 미술관을 누리는 해외 체류 고객들을 대상으로 퍼스널 도슨트 사업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성공과 실패에서 배운 수완으로 재능 있는 도슨트들이 한 자리에서 해외의 여러 관람객들을 안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냈다. 그녀가 만들어준 최적의 환경 속에서 재우는 도슨트 제이라는 닉네임으로, 앉은자리에서 사건을 처리하는 네로 울프 탐정처럼 국내외 미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관한 자료를 흡수하고 자신의 언어로 버무려냈으며, 그렇게 만든 언어로 그림 너머의 미스터리를 풀고자 하는 고객들의 요구를 훌륭하게 충족시켜주었다.


달그락. 달그락.


머그잔을 닦던 재우는 개수대 옆에 난 작은 창문으로 바깥의 설경을 응시했다. 하얀 눈발이 그를 아득한 기억 속으로 끌었. 미팅 준비를 마치고 나오던 재인이 그의 뒷모습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다 수돗물을 대신 잠그 속삭였다.


"미리 얘기하는데. 티 내지 마."


"뭘 티 내지 마?"


회의실로 방향을 틀던 재우가 그녀에게서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베를린에서 대기 중이던 기획자들이 모니터 너머로 남매를 반겼다.


"우리 대한민국 전시계를 이끄는 두 인재들! 이게 얼마만입니까?"


커다란 모니터 화면 인상 좋은 두 중년의 상기된 얼굴이 보였다. 독일은 이미 한밤중이었는데도 기획은 기운이 넘치고 있었다. 남매는 이번 전시에 대한 그들의 기대감과 열정을 가늠할 수 있었다. 한독수교 140주년을 맞아, 그로피우스 바우 전시관에서 한국의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기획전을 열게 된  과연 흥분할 만한 일이기는 했다. 그들은 안부와 덕담으로 기운차게 시동을 걸고는 메일로 넘겼던 전시의 개요와 일정, 초대 작가 명단, 그리고 작품 목록을 빠르게 소개다. 재우는 언제 게으름을 피웠냐는 듯 목차 유심히 살폈다. 최근 들어 그가 눈여겨봐두었던 젊은 작가들의 이름이 보였다. 전반전으로 참신하며 도전적인 작품, 시의성 있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이 잘 선별되어 있었다. 하지만 개중에는 그저 국내 인지도에 힘입어 뽑힌 듯한 작품도 섞여 있었다.


화면에서 품목 슬라이드가 하나, 둘, 세 장을 지나가던 찰나. 그녀의 이름이 언뜻 다. 재우는 잘못 본 것인가 갸웃거리며 출력해둔 문서에서 작품과 작가의 이름을 확인했다.


작품명: 그물

작가: 조연희


회의실의 통유리 밖으로 펼쳐진 은빛 빌딩들과 설경, 연한 상아색의 실내 벽지까지. 모든 게 일제히 밝은 조도를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재우는 돌연 눈앞이 캄해지는 걸 느꼈다. 이윽고 나머지 세 사람의 대화가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웅웅 거리기 시작했다. 재인은 일정과 지급 문제로 넘어가 미팅을 신속히 마무리 지으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의가 길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다른 이유가 숨어있는 것 같았다. 재우 재인을 쳐다보았다.  알면서 이번 일을 자신에게 맡기려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잠자코 있던 그가 불쑥 세 사람의 대화를 끊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재인이 눈짓으로 그만두라는 신호를 주었지만 재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작고한 작가의 작품도 이번 전시에 올립니까?"


"아, 연희 작가 말이로군요. 예외적으로 올리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몇 년 전부터 그녀의 작품을 소개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어요. 그런 훌륭한 작가를 잃은 것은 한국으로서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 작품은 어떻게 찾은 겁니까?"


"아아. 그러고 보니 도슨트 제이께서 조연희 작가 전문가였다는 걸 깜빡했군요! 이 미공개 작품은 조연석 이사가 저희 쪽에 처음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조연석 이사가요..."


"네, 무슨 문제라도?"


"죄송하지만 저는 이번에 참여가 어렵겠습니다. 유재인 대표님이 더 알맞은 도슨트를 연결해주실 겁니다."


재우가 회의실을 나가자 재인은 들고 있던 펜을 떨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기획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입을 다물었고, 설명을 요구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구태여 마음의 그늘을 내비쳐 무엇하나.


느슨하게 사는 것. 그게 재우의 신조였다. 다만 이런 순간이 오면 그는 뼛속까지 어둠에 잠기는 듯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문을 박차고 나왔는데 마음껏 내달릴 수 없는 것. 이내 누군가의 손에 붙들려 억지 위로와 회유를 받는 것. 하필 그날이 휠체어의 바퀴를 어디로는 미끄러트릴 수 있는 눈이 쏟아지는 날인 것.


고맙게도 재인은 그 뒤를 따라 나오지 않았다. 재우가 홀로 바람을 쐴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배려들 마저 쓰리게 다가왔다.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재인 나도 오늘 아침에 알았어. 어제 결정된 거래.


"아."


손이 불에 덴 듯 욱신거을 떨구었다. 하게 휠을 돌린 탓이다. 재우는 주먹을 꼭 쥐며, 막 불을 밝힌 가로등과 그 밑에서 반짝이는 눈발 보며 숨을 골랐다. 그렇게 천히 또 한 겹 질을 만들었다.






누군가의 음을 분노와 회한이 휘젓고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이 순간은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야 마땅하다는 듯, 해맑은 캐럴과 트리들, 금빛 쇼윈도 앞에 몰려든 인파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설렘들이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현장의 구심점에 거대한 신의 선물 상자처럼 수만 개의 전구와 리본으로 치장된 대형 백화점이 있었다.


퇴근 시간에 이르자 더 많은 사람들이 백화점으로 몰려들었고, 그들을 맞이하는 1층 중앙에는 연휴 시즌에 선보일 커다란 이벤트 홀이 설치되고 있었다. 사람 몸체만 한 상자에서 부자재들과 장식 소품들이 실려 나오고 실려 들어갔다. 창고 입구는 백화점 뒤편 야외로 이어졌고, 그 문 옆으로 서너 대의 트럭들이 덜덜거리며 대기 중이었다. 물자 전달을 마친 운송업자들은 떠나갔고 아직 기다려야 하는 운전자들은 밤 운전의 졸음을 미리 몰아내기 위하여 담배를 물었다.


문수 그들 틈에 섞여 동료에게 한 개비를 얻어 피웠다. 끝을 깨물면 톡 소리가 나 담배였다. 그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지만 아쉬운 대로 릿느릿 쌉싸름한 향을 삼켰다. 러면서 그는 직원들이 들락거리는 뒷문을 응시했다. 문은 열리고 닫힐 때마다 즈풍의 캐럴 음악회랑을 누비는 구두굽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나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런 무의미한 소들이 아니었다.


이윽고 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느 때처럼 함께 일하는 다른 직원과 함께였다. 두 사람이 한동안 말없이 핸드폰의 스크롤을 내리는 동안 스크린의 불빛이 그들의 둥근 얼을 부드럽게 비었다.


"이것 봐. 나 팔로워 수 또 늘었."


"에? 주만에 이렇게 늘었다고?"


"왜 사람들은 내 셀카만 좋아할까? 내 생각을 담은 글에는 호응도 안 해주면서."


"글자  귀찮은가보지."


후우. 연기를 내뱉으며 그 친구가 말했다.


"뭐야. 너 이 전시 또 보러 갔어?"


"응."


그녀가 웃는다.


"믿을 수가 없다. 그 도슨트 제이인가 엠인가 때문에?"


"제이라 몇 번 말해. 너도 다음에 여기 전시 보러 갈 때 제이 시간대로 예약해봐."


"든."


"이 사람 설명진짜 잘해준다니까? 위기도 편안하게 이끌고. 이건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후회 안 할 거야."


"야. 난 전시 같은 거 싫어해. 다가 벽 쳐다보고, 해하는 척하면서 고개 끄덕가 또 걷고! 글거려. 안 맞아, 안 맞아."


"혼자 파기에는 아깝단 말이야. 같이 가보자. 응?"


이어지는 사람의 맑고 천진한 웃음소리에 문수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지만 괜한 오해를 살까 눌러 참다. 그는 녀가 누구를  좋아하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저 저토록 아름답고 명랑한 존재가 아직 그 자리에, 그가 이따금 와닿는 세상에 변함없이 물러 있다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한 블록 거리에 떨어져 있는 재래시장과 이 백화점이 전혀 다른 성격을 지녔음에도 오래전부터 나란히 조화를 이룬 것처럼. 그는 일찍이 다른 세상의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공존할 줄 았다. 하지만 오늘은. 모든 안주와  책감이 들었다. 평화웠던 마음 잘못 붙은 촛불처럼 타오르다 사그라들었. 


써 행복해도 되는 걸까?


단 이 오르자 담배 맛이 없어졌다.

 

"진경 씨, 매니저 님이 찾는데요!"


"네, 들어가요! 어휴. 왜 맨날 나만 찾니."


"고마운 줄 알아. 는 투명인간 취급 당하는데. 난 더 있다 들어갈게."


이제 뒷문에는  사람만 남았다. 그녀의 친구가 문수를 의식하는 게 느껴지자 그는 반쯤 남은 담배를 쓰레기통에 비벼 넣고 트럭에 올랐다. 음악을 틀고 히터를 튼. 그리고 생각에 잠긴다. 비어있던 조수석에서 성한 회갈색의  가진 개의 형상이 나타나 다정하게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깊은 눈빛이 렇게 말하고 있었다.


뭐해.

너답지 않게.

기운 내.

 

문수가 숨을 삼키자 개의 형상이 연기처럼 서서히 사라졌다. 그 정신을 붙들기 위해 니트 모자를 고쳐 썼다. 여전히 창밖에는 눈이 퍼붓고 있다. 점점 더 많이, 간격을 좁히며 촘촘하게 쏟아붓고 있었다. 오늘 그는  길을 달려야만 한다.


"빌어먹을 눈."


그의 나지막한 혼잣말이 에 묻혀가는 시멘트 도로처럼 라디오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파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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