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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아 Jan 13. 2022

퐁당소리가 나는 추락

재인(N)


추락했다고 믿은 순간에도 사실 너는 하늘을 날고 있었으면서. 

수면 위로 겨우 떠오른 내게 더 내려가라고 말한다. 

왜 너와 함께 가라앉지 않느냐고 말한다. 


내가 물 밑바닥에 있던 것도 몰랐으면서. 

내가 추락하는 소리에 귀 기울인 적도 없으면서. 

나에게 주어진 화폭을 너의 추락으로 채우길 바라는 건 무슨 오만인가. 


다만 나는 무시하지 않고 담아내겠다. 

루벤스 대신 브뤼겔처럼.

 전경 중앙이 아니라 원경 오른쪽에 너의 추락을 담겠다. 


나의 추락을 똑같이 그려내라고 요구하지도 않겠다. 

왜냐면 너는 아직 자화상 밖에 그릴 줄 모르니 말이다.


피터 브뤼겔의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퍼스널 도슨트 제이

네 번째

퐁당소리가 나는 추락




"다시 말해봐."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재인이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내가 조 이사를 만나러 간 건..."


"누가 그게 궁금하대?"


그녀가 언성을 높이자 당직 간호사가 상황을 보기 위해 병실로 달려왔다. 재우는 간호사를 향해 괜찮다는 의미로 손짓을 해 보였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외진 곳에 혼자 간 거야?"


재우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질렀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돌아오는 길에 유람선도 아닌 웬 나룻배가 한강에 떠 있는 게 보였다고. 정말 먼 거리인데도 안쪽이 파랗게 칠이 된 것이며 엉킨 그물이 쌓여있는 게 훤히 보였다고. 그걸 보니 그 사람 생각이 났다고...


택시 기사에게 근처 아무 곳에나 세워달라고 한 재우는 좁아지는 포장도로와 흙길을 지나 거침없이 강가를 향해 들어갔다. 그러나 나룻배가 정박된 부둣가로 이어질 줄 알았던 길은 나무 등걸이나 물웅덩이로 막혀있었고 가까워지는가 싶으면 영 엉뚱한 장소가 나타났다. 날이 어둑해져 결국 수수께끼의 배는 보지도 못한 채 주차장으로 돌아왔는데, 손님을 목적지에 떨구었다고 생각한 택시는 이미 떠나고 보이지 않았다.


습지는 고속도로에서 곧장 이어진 장소로 오직 차로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다시 차를 부르기 위해서 주머니를 뒤지던 재우는 폰이 사라진 것을 알고 낙심했다. 웅덩이를 무리해서 건너다가 떨군 모양이었다. 밑단이 축축해진 외투의 감촉이 그 점을 주지시켜주었다. 그는 입술을 깨문 채 경사진 차로에 올랐다.


길이 젖어 휠체어의 바퀴가 자꾸만 헛돌았다. 난간을 붙잡고 어깨가 얼얼해질 만큼 올라가서 보니 고작 삼분의 일 지점. 설상가상 눈발이 더 굵어지며 주변 일대는 마치 모래 거미의 함정처럼 변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재우는 난간을 붙잡느라 벌겋게 부어오른 손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이게 다 무엇을 위한 노력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렇지 않은가? 그에게는 더 이상 목적도, 지키고 싶은 것도, 의무감도 남아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 놀랍도록 마음이 평안해진 그는 두 손을 놓았다.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부터. 손잡이로부터. 모든 것들로부터.


얼마 후. 그는 인근 병원의 병실에서 때어났다. 그는 세상을 놓았지만 세상은 무슨 이유에선지 그를 여전히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누나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간호석에 주저앉은 재인이 벽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순간 재우는 자신에게 목적도, 지키고 싶은 것도, 의무감도 없다는 생각이 큰 착각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에게는 재인이 있었다. 그녀에게 평생 진 빚을 이런 식으로 갚으려던 건 정말이지 아니었는데... 미안한 마음이 든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링거 바늘이 꼽힌 팔뚝만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은 채로 재인이 물었다.


"그래서. 이제는 괜찮은 거야?"


"그렇대도."


"확실해?"


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재인의 눈 고였던 물기가 사라지고 매서운 기수의 눈빛이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짐가방에서 두터운 전시 가이드 스크립트와 노트북, 헤드셋, 임시 휴대폰을 꺼내더니 침대의 간이 식탁을 펼쳐 쏟아 놓았다. 재우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다급하게 물었다.


"진심이야? 여긴 응급실 옆이야."


"그래서 노이즈 프리 장비로 산 거잖아. 은지 씨에게는 너 대신 도슨트 뛸 필요 없다고 연락할게. 테이트 모던 가이드. 다섯 시간 뒤니까 푹 자고 충분히 할 수 있겠지?"


이건 일종의 복수다. 그녀를 놀라게 한 복수. 아니 어쩌면 마땅히 재우가 해내야 할 일이다. 그래도 이렇게 무자비할 수가. 재우는 은지든 누구든, 재인 에이전시에 소속된 모든 도슨트들이 이 무서운 사람을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남매지간이 아니었다면 그는 진즉에 달아났을지도 모르는데.


"아침에 픽업하러 올게."


"응."


"너 말고 이 장비들. 네, 은지 씨! 나 재인이에요..."


멀어져가는 재인의 뒷모습을 보며, 재우는 상황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무겁고 진지했던 그의 감정을 누나는 어떻게 받아들인 걸까? 남은 관성과 여운 따위 곱씹을 틈도 주지 않는 걸 보면, 날아가는 파리나 거리의 깡통쯤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돌이켜보면 재인은 그와 함께 심연으로 가라앉은 적이 없다. 저 수면 위에 유연하게 떠 있으면서 가라앉는 그를 잡아 올려주었다. 수압 차이에 적응할 틈도 주지 않고. 성미 급한 낚시꾼처럼.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녀가 옳았다.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물 밑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공기가, 산소가 필요하다.


일단 푹 쉬어야 겠다. 


피곤에 지친 몸을 뒤척이던 문수는 병실 벽면에 걸린 작은 그림을 발견했다. 익명의 작가가 다소 어설픈 붓터치와 제한된 물감으로 세잔의 정물화를 따라 그린 작품이었다. 재우는 세잔을 모른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 보았다. 그 대단한 화가의 신념과 기법과 애용하는 색깔의 이름들을 모른다고 최면을 걸었다. 그러자 이 소박한 그림에서 나름의 매력과 연민이 느껴졌다. 그는 인간 역시 어떤 온전하고 완벽한 명화의 모작이라는 느낌을 받아오고는 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림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병실의 환자로 찾아온 재우에게 그림은 잔잔한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몸을 일으키는데, 침상 곁에 있어야 할 휠체어가 보이지 않았다. 간호사에게 물을까 하다가 그는 먼저 재인에게 문자를 했다.


재우 내 휠체어는?


재인 구급차 불러준 사람이 따로 싣고 왔다는데. 번호 줄게. 연락해봐.






문수는 꼬박 밤을 지새웠다. 남자가 무사하다는 말을 듣고 병원에 연락처를 남긴 다음 곧장 집으로 들어왔다.놀란 마음은 몇 시간이 지나도록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누군가 그를 발견해서 더 현명하고 신속하게 구조했을 수 있다.

하지만 신은 하필 그에게 그런 기회를 주었다.


문수는 책상 위의 엽서를 바라보았다. 전시관 기념품점에서 사 온,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가 찍힌 엽서를. 한동안 그렇게 앉아있다가 눈이 비로 바뀌어 툭툭 창문을 두드 무렵 짐을 싸기 시작했다. 물 한 컵 마시려는 사람처럼. 코를 풀려는 사람처럼. 한주치의 짐을 쌌다. 그러다 조금 더 큰 가방으로 가지고 나와 한달치의 짐을 쌌다. 그러다가 이번엔 트렁크를 끌고 나와 일년치의 짐을 쌌다. 


지금이라고 어부가 될 수 없겠는가.

목수가 될 수 없겠는가.

카메라를 들 수 없겠는가.

 

방랑자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2년전 기훈과 포르투갈로 향했을 때 챙긴 여권을 집어들어 앞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잠갔다. 그러자 작은 사각형 실루엣이 위로 솟으며 짐가방이 마치 비문이 붙은 관처럼 보였다. 불길한걸. 다시  풀러야 할까.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엽서와 문간의 트렁크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네."


"안녕하세요. 유재우라고 합니다."


종소리. 커다란 종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와 문수는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화를 건 사람은 침묵하는 수신자를 기다리느라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 어제 저를 발견하고 구급차를 불러주셨다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문수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그가 했어야 할 말은 이것인데, 여전히 의식의 종소리 남긴 여진 때문에 얼버무리듯 이렇게 답했다.


"네네."


"감사 인사도 드릴 겸, 뭘 좀 물어보려고 연락드렸습니다."


"물어보세요."


"제 휠체어를 가지고 계신가 해서요. ...여보세요?"


이마를 탁 치며 문수가 뒤늦게 대답했다.


"이런 세상에...  트럭에 실어서 가져와버렸네요."


발신자는 휠체어를 다시 보내주었으면 하고 부탁을 했지만, 문수의 귀에 더는 아무런 문장도 들어오지 않았다. 엽서와 기름떼 묻은 트렁크의 바퀴 자국이 발신자에 관한 힌트를 주고 있었지만 문수는 발견하지 못했다. 해서 그는 모든 일을 단행하기 전에, 떠나기 전에, 어쩌면 떠나기 위해서 묻기로 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혹시..."


"네."


"혹시 그쪽 직업이 도슨트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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