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우(N)
중세 유럽에도 개인의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게시판이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모두가 볼 수 있는 온라인이 아닌 서재나 응접실에 벽에 걸려 있던 그 게시판은 바로 편지걸이입니다. 귀족들은 화가에게 특별히 편지걸이 그림을 주문하기도 했는데요. 거기엔 종종 취향과 신분, 지위를 상징하는 물건들이 추가되었습니다.
르네상스 화가 비토레 카르파치오의 편지걸이는 그런 그림들에 비해 소박한 편입니다. 몇 장의 편지 외에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죠. 대신 이 그림에는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작품 뒷면에 또 다른 그림이 감추어져 있거든요.
비토레 카르파치오의 '편지걸이' ('갯벌에서의 수렵' 뒷면)
당신에게도 '나'라는 존재를 보여줄 편지걸이가 하나쯤 있을 겁니다.
거기에 무엇을 걸어놓았나요?
온전한 자신을 보여주고 있나요?
아니면 그 이면에 또 다른 모습을 감추고 있나요?
퍼스널 도슨트 제이
여섯 번째
이 작품을 설명하시오
무대는 첫인상에서 예감했던 것처럼 독특한 면모를 지닌 친구였는데,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구석은 화가 폴 세잔의 열성 팬이라는 점이었다.
세잔에 대해서는 사과 그림밖에 알지 못했던 문수는 한 번도 작가의 사진을 본 적이 없었기에 하얀 가발을 쓴 뉴턴의 얼굴을 떠올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이 열성팬이 세잔의 얼굴을 보여줬을 때는 괜히 아는 척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는 대화의 첫 단추가 무엇이 되었든 세잔과 연결 지어 주제를 이어나갈 줄 알았다. 그래서 문수의 뇌리에는 하루에도 여러 번 원뿔, 사과, 카드게임, 소나무 따위로 종결되는 대화의 패턴이 단단히 각인되기에 이르렀다.
한 번은 무대가 총괄 디자인을 맡은 연극에 초대되어 보러 간 적이 있는데, 배경에 어김없이 원뿔과 구체 같은 기본 조형물들이 놓여 있었고 사과가 등장했으며, 카드게임과 소나무가 배치되어 있었다. 문수는 이 연극이 세잔에 관한 극이었는지 제목을 몇번 확인했지만, 그 후기 인상파 화가와는 조금도 상관이 없어 보였다. 그는 친구가 이렇게 모든 연극을 세잔 풍으로 꾸며놓아서야 앞으로 계속 벌어먹고살 수 있을지 염려가 되었다. 그러나 막상 친구가 눈을 빛내며 어땠는지 물었을 때는 '다 좋았고, 역시 무대와 의상이 최고였다'라고 말해주었다. 만족스럽게 흥이 오른 친구는 평소보다 두 배로 말을 많이 했고, 그 덕에 두 사람은 평소보다 두 배나 긴 시간을 거닐었다.
정처 없이 걷고 얘기를 나누는 도중에 문수는 가슴 한 켠의 짐을 잊을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다른 사람이 사랑하는 것들로 그 자리를 대신 채우는 것. 그는 무대의 입에서 쏟아지는 단어들 틈에다 슬쩍 짐을 내맡겼다. 그러자 그것들이 열차에 실려가듯 빠르게, 때로는 슈프레 강물에 쓸려가듯 느긋하게 멀어져 가는 게 느껴졌다.
깊은 어둠이 지나가고 날이 밝아오자 두 사람은 일찍 문을 연 레스토랑의 테라스에 앉아 식사를 주문했다. 한참을 걸어 몸에 열이 오른 문수가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그때 주머니에서 비죽 튀어나온 엽서를 발견한 무대가 입을 쩍 벌리며 외쳤다.
"이거 뜻밖인데. 자네에게 이런 감수성이 있을 줄이야!"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그림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문수는 머쓱해져 말을 돌렸다.
"독일 작가 그림이라는데, 여태 독일에서 이런 산을 본 적이 없어."
그러자 무대가 파하하 웃었다.
"전국을 다 돌아본 것도 아니면서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이 산은 체코 접경지역에 있는 엘브잔트슈타인 산이야. 산은 화가들에게 사랑받는 메타포지. 세잔이 그린 생빅투아르 산이 밝고 완만한 형세라면 엘브잔트슈타인은 엽서에서처럼 검은 바위들이 탑처럼 솟아 있어. 두 작가 모두 사색적인 인물들이었지만, 산 취향을 놓고 보면 근본적으로 다른 영혼을 품었을 거라고 생각해. "
무대는 이 말을 하면서 엘브잔트슈타인 산을 검색해 문수에게 보여주려고 내밀었다. 그러자 문수는 손을 내저으며 그림이 준 여운을 깨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뭘 두려워하는지 알겠네. 하지만 실물을 본다고 해서 저 위대한 그림이 씌워준 안경이 쉽게 벗겨지지는 않을 거야."
"안경이라고?"
"그래. 예술가의 또 다른 이름은 안경 장수라는 말 못들어봤나? 세상을 보는 자기만의 시선을 제공하는 사람들이니까."
"나한테도 그런 안경이 있을까?"
"물론! 어디 휴대용 미술관 좀 보여줘 봐."
"그건 또 무슨 소린지..."
무대는 친구의 앞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더니 갤러리 아이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여기 갤러리 아이콘 보이지? 어디 한번 자네 미술관 안을 들여다보자고."
"아, 잠시만."
"체류 증빙 서류, 여권 사진, 생선 상자, 영수증, 생선 상자, 생선 상자, 또 생선 상자...."
세잔의 후예는 몹시 당황하며 말했다.
"뭐... 안경 없는 사람도 있어야 안경이 팔리는 법이니까."
살짝 자존심이 상한 문수는 친구의 손에서 핸드폰을 도로 낚아챘다.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포기해. 내가 보기엔 가망이 없네."
이렇게 냉정한 평가를 내린 무대는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문수의 표정을 보고 선심을 쓰듯 덧붙였다.
"참! 조만간 포츠다머 광장 근처에서 한국 작가들을 소개하는 전시가 열린다던데. 자네 미적 소양을 키워보기 위해 같이 가보면 어떨까?"
"봐서."
"꽁한 구석이 있는 것도 처음 알았네."
이윽고 배를 채운 둘은 한동안 말없이 건물 외벽의 덩굴 위로 햇살이 뻗어가는 것을 보다가, 아래로 흐르는 강물살을 내려다 보다가, 하나 둘 늘어나는 행인들의 걸음으로 시선을 옮겼다.
식탁을 두드리는 친구의 초조한 손가락.
접시 가장자리에 모아놓은 소시지 껍데기.
나이테처럼 층층이 커피 자국이 남은 컵의 안쪽면.
이토록 일상적인 장면을 무슨 다른 시선으로 본다는 것인지, 그런 시야는 반드시 타고나야만 하는 것인지, 그 도슨트 선생이라면 이런 장면에도 그럴싸한 해석을 붙여줄 수 있을지 하는 질문들이 문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까다로운 예술가 친구의 눈치를 보며 주변 풍경을 카메라에 담은 문수는 망설이는 손길로 재우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그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감싼 일종의 구조 신호였다.
'이 작품을 설명하시오.'
그날부로 재우는 한 주에 한번 꼴로 몇 장의 사진과 '이 작품을 설명하시오'라는 문자를 받았다. 딱히 답을 바라는 질문처럼 보이지 않아 코멘트를 달지는 않았다.
처음 문수의 사진을 받았을 때, 그는 영화 '아멜리에'에 나오는 정원 인형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유령이 되어 그를 대신해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문수가 사진 뒤에 한결같이 붙이는 메시지는 괴도의 전언처럼 느껴져 부담스럽다가도 가끔은 어떤 사진이 날아올까 기다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재우는 문수의 연락을 무심히 넘겼다.
그의 온 정신은 베를린의 마틴 그로피우스 바우 전시장에 놓인 연희의 조각에 가 있었고, 그녀의 작품을 올바로 세상에 전달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연석 이사가 멋대로 갖다 붙인 작품 설명을 그대로 읽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조연석 이사가 멋대로 갖다 붙인 작품 설명을 그대로 읽을 생각은 없어."
"그럼 어쩔 건데?"
재인이 물었다. 재우는 문서를 파쇄기에 넣고는 두 손을 털었다.
"내가 처음부터 원고를 다시 쓸 거야."
"나는 못 봤다. 나는 못 봤다..."
대표의 우려를 가뿐히 넘겨버린 도슨트는 노트북 앞에 앉아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떠올려보자. 연희가 끊어진 그물 조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는지."
잠시 후. 재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지우려 애썼던 기억들을 찬찬히 들여다 본 다음, 가이드를 위한 원고를 완성해냈다. 그러나 도슨트가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쳤는데도 개관 후 한 주가 넘도록 한국인 관광객들의 가이드 신청은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현장에 비치된 짧은 소개문으로 연희의 작품을 건성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은 재우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었기에 점점 초조해졌다. 열흘째가 되던 날. 손 꼽아 기다리던 첫 번째 신청이 들어왔다.
관객은 베를린 예술대학에 재학 중인 20대 중반의 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연희와 처음 만났을 때가 바로 그 나이쯤이었기에 재우는 안내 초입부터 산란해지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여러 작품을 차례로 설명하고 마침내 '그물' 조각 앞에 도착해서, 도슨트는 그 작품 설명에 유난히 힘을 주었다는 걸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간신히 마지막 문장을 맺고 다음으로 넘어가려던 순간 학생이 그에게 물었다.
"조각 밑에 쌓인 저 편지들도 작품 일부에요?"
"편지들이요?"
"네, 밑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데요."
편지라니. 포장제가 여태 치워지지 않은 걸까? 아니면 연석 이사가 그녀의 작품에 새로운 요소를 마음대로 덧붙인 걸까.
"실례지만, 사진을 좀 찍어서 제 번호로 보내주시겠어요?"
잠시 후. 학생이 찍어준 현장 사진이 날아왔다. 끊어진 그물을 묘사한 연희의 조각 밑으로 정말 한 무더기의 편지지가 쌓여 있었다. 가이드를 마무리한 재우는 곧장 주최측에 연락해 상황을 물었다.
"아, 그 종이들이요? 얼마 전에 관람객이 한 명이 쪽지에 뭘 써서 그물 틈에 던져 넣더군요. 뭐하는 거냐고 물으니까, 버려야 할 생각이 있어서 거기에 버렸다는 거예요. 단단히 주의를 주고 돌려보냈는데, 그새 다른 사람들이 따라하고 있지 뭡니까? 그게 도미노처럼 이어져서 매번 말리기가 어렵더라고요. 관객들과 소통하는 작품이라는 이미지도 벌써 생겼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래서 일단 그대로 두었습니다. 종이들은 저녁마다 회수하고 있고요. 작품에는 손상이 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담당자는 맨처음 그물 틈으로 버려진 쪽지를 펼쳐서 재우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엔 투박한 필체로 낯익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 작품을 설명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