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아 Mar 11. 2022

머릿돌 작가

문수(N)


독일 사람들은 내 친구 무대를 야곱이라 불렀다. 영문 이름 제이콥의 J가 묵음이 되어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나중에 그 이름의 뜻을 한번 찾아봐야지 다짐했다. 젊은 시절 나는 몇 년 동안 경비 일을 했었는데, 문수의 뜻이 ‘문을 지키는 자’라는 걸 떠올리고는 이름이 어느 정도 그 사람 운명에 영향을 준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잠시 잊고 있던 그 다짐은 귀국행 비행기에 올라서야 생각났다. 야곱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한밤중에 ‘내가 너 와 함께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도망쳐 나와 살다가 수많은 고난을 겪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귀로에 있었다. 지금의 나처럼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고, 잠을 잘 때는 호신용으로 돌을 베고 누웠다. 베개이자 무기였던 그 돌은 다음 날 신의 언약을 기리는 비석으로 세워졌다.


나를 짓누르던 것이 어느 날 방패가 될 수 있다. 내가 무기로 품고 있던 것이 감사의 표식이 될 수 있다. 인생 한 치 앞도 모른다는 말은 정말 맞는 말이다. 다만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야곱의 비석처럼, 건물의 기원을 품고 그 앞을 굳게 지키는 저 머릿돌처럼.



호세 데 리베라의 '야곱의 꿈'




퍼스널 도슨트 제이

일곱 번째

머릿돌 작가





"...스페인 작가전의 마지막 작품 '야곱의 꿈'이었습니다. 아직 한 번도 질문 못 하신 분들. 지금이 기회니까 편하게 물어보세요."


"저 아저씨 잠자는 폼이 너무 불편해 보이는데요. 정말 저런 포즈로 잘 수 있어요?"


친구들 틈에 말없이 섞여 있던 남학생 하나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현장 도슨트를 시작하며 재우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자신의 눈높이가 학생들의 눈높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성인 관객들보다는 어린 친구들의 얼굴과 감정을 더 빠르게 읽어 낼 수 있었고 무리 없이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재우는 언젠가 비슷한 질문을 했던 관객을 떠올리면서, 그 옛날 그림의 모델과 어색한 포즈의 역사를 짧고 명료하게 짚어준 다음 안내를 마무리 지었다. 학생들은 도슨트와 교사를 향해 우렁차게 '수고하셨습니다' 인사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밖에 눈 온다!"


전시관에 좀 더 머물고 싶은 듯 보였던 아이들까지 눈이 온다는 말 한마디에 우르르 뛰쳐나갔다.


"눈이 그렇게 좋을까..."


두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도슨트는 시원섭섭함을 느끼며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통유리로 다가섰다. 벌써 도착했어야 할 재인의 차가 보이지 않아 전화를 걸어 보려던 찰나, 그녀에게서 먼저 전화가 왔다.


"어."


"잘 끝났어?"


"응. 맞춰 전화했네. 여태 안 오고 어디야?"


"아주 나를 운전기사로 알지."

"그래서 운전기사 예산 빼 달라고 했는데 싫다고 했잖아."


"됐고. 지금 눈 때문에 좀 막혀. 한 시간? 아니다 두 시간?"


"그렇게나? 일단 알았어. 조심히 와."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고, 전시장의 폐장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머물러 있어도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재우는 로비를 지키직원을 찾아가서 물었다.


"저기요."


"네, 선생님."


"데리러 오기로 한 사람이  늦는다고 해서 여기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저희도 지금 보수 공사 차량 기다리는 중이라 퇴근을 못하고 있거든요. 금방 온다고 했는데..."


재우만큼이나 제시간에 퇴근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직원이 손톱을 깨물며 입구를 내다보았다.


"다행이네요. 한 가지만 더 여쭈어볼게요."


"네."


"이 전시관 머릿돌은 어느 쪽에 있죠? 정문에서 못 본 것 같아서."


"아, 입구가 바뀌었어요. 언덕 경사로가 없어지면서 정문이 후문이 됐거든요. 저쪽으로 나가시면 보일 거예요."


바로 그때, 건물 에서 트럭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 저기 왔다. 선생님, 거기 흙길이니까 나가진 마시고... 벌써 가셨나?"






한때 정문 자리였던 전시관의 뒤편으로 나오니 포항 영일만 해변이 내려다보였다. 재우가 그의 세 번째 현장 가이드를 위해 이곳을 찾은 이유에는 시원한 겨울 바다에 대한 열망과 자기 극복의 의지도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는 핸드폰에 남은 문수와의 대화창을 찾아 열고 스크롤을 올렸다.


함부르크의 어시장, 연극 무대의 뒤편, 드레스덴의 크리스마스 시장, 어부와 트럭 운전사들... 아직까지 사진의 구도며 주제가 중구난방이었지만, 복잡한 암호 안에서 패턴이 발견되듯 문수가 좋아하는 장면들의 패턴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쌓이다  보면 곧 그만의 시선이 완성될 것이다.


그가 보내온 마지막 사진은 비행기 안에서 구름바다를 찍은 사진이었다.


그는 또 어디로 떠난 걸까? 재우는 그의 자유로움이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두려웠다. 그런 분방함은 얼마든지 재우를 조바심 나게 만들 수 있었다. 도슨트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부스 밖으로 나온 자신을 격려했다. 현장에서 가이드를 진행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이미 큰 도전이자 변화였다.


머릿돌을 찾으러 램프 계단을 내려오고 보니 길이 온통 흙탕물이었다. 돌아갈까 망설이다가 심호흡을 하고 힘차게 휠을 굴렸다.


"재인이 보면 미쳤다고 하겠지."


그는 웅덩이들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머릿돌이 묻혔을 법한 화단을 따라갔다. 몇 미터 더 들어가서 관목을 이리저리 파헤쳐보니 눈에 뒤덮인 넓적한 머릿돌모습을 드러냈다.


"말도 안 돼... 진짜 있네." 


머릿돌이 박힌 시멘트 지지대의 한쪽에는 정말로 큼지막한 엄지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인주를 가져다가 본을 떠도 될 만큼 선명한 흔적이었다.


"엄지 손가락 한번 대단히 크시네요, 작가님."


재우는 웃음을 터뜨리며 카메라로 문수의 손자국을 찍었다.


"어이! 거기서 뭐 해요?"


경비로 보이는 남자가 멀리서 재우를 향해 외쳤다. 그 뒤에 세워진 트럭의 헤드라이트 빛에 눈이 부셔, 재우는 손으로 차양을 만들 마주 외쳤다.


"아! 죄송합니다. 확인할 게 좀 있어서. 이제 들어가려고요."


휠체어 돌리던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잠깐 사이 웅덩이들이 늘어나 길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하..."


"내 그럴 줄 알았지. 이 뒤쪽은 바닥 포장이 아직 덜 됐어요. 잠깐 있어 봐요!"


곧이어 남자는 트럭에서 기다란 판자를 꺼내 들고 와 길목을 대주었다.


"이 위로 해서 들어오세요."


"고맙습니다."


무사히 전시관 입구에 도착한 재우가 어깨에 쌓인 눈을 털며 남자를 향해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했다. 돌아서는 그의 등에 대고 남자가 물었다.


"그래서. 내 첫 작품은 어땠습니까?"


낯익은 목소리. 재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작가 선생님?"


"도슨트 선생님."


이미 한참 전에 재우를 먼저 알아본 문수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꼭 필요한 순간 필요한 무게의 위로가 닿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하지만 삶이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가 없어서, 가끔 그런 기적 이 일어나기도 한다.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당신이 누군가에게 그런 기적이 될 수도 있다.


도슨트의 손을 마주 잡은 머릿돌 작가의 손이, 멀리 해수의 향기를 담아온 큼지막한 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전 07화 이 작품을 설명하시오 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