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 가이드를 수년간 해오며 재우가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모든 사람에게는 나름의 언어 습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기민했을 때는 수년만에 같은 고객과 다시 연결되더라도 어디서 들은 적 있는 목소리라는 걸 금방 알아챘다. 하지만 오늘의 그는 텅 빈 껍데기 상태였으므로, 문수와의 전화를 끊고 나서 뒷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맑은 정신이었다면 첫인사에서부터 그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전시의 관람객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네네.
이렇게 네를 여러 번 말하는 점이나, 낮고 거친 발성같은 것으로.
"혹시 도슨트 아닙니까?"
당황한 재우가 아무 말도 못 하자 그제야 상대는 자신을 문수라고 소개했다. 이제 그는 문수에게 두 가지 신세를 지게 됐다. 첫째로 그와 그림의 대화를 엿들은 것. 둘째로 눈에 깔려 영영 의식을 잃을 뻔한 사고에서 구조받은 것. 첫 번째 일에 대해서는 감히 털어놓을 수 없었기에, 더듬더듬 통성명을 나누다가 재우는 뭉뚱그려 이렇게 말했다.
"...이 신세를 어떻게 갚죠."
진심에서 꺼낸 말이긴 했지만, 문수가 진지하게 그 방법을 고민하는 듯하자 재우는 내심 당황했다.
문수는 응당 받고 싶었던 게 있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흠 소리를 내더니 입을 열었다.
"도슨트 선생님의 물건은 날이 밝기 전에 병원 로비에다 맡기겠습니다. 그 대신..."
"그 대신?"
"내가 내일 정오에 한국을 떠납니다. 공항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데, 그동안 얘기를 좀 들려주세요."
"무슨 얘기를..."
"선생님 이야기요."
평생 그림에 관한 해설만 해오던 사람에게 너 자신을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그는 바로 대답할 수 있을까? 재우는 벽에 걸린 시계를 흘깃 올려다보았다. 전시관과 연결되기까지 앞으로 두어 시간. 그의 얘기를 쏟아놓아기에 시간이 턱 없이 부족했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나를 그림에 빗대자면 어떤 그림과 비슷할까.
샤갈? 그건 알퐁스 도데나 헤르만 헤세 같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그림이다. 클레? 그건 생택쥐페리쯤 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호퍼의 그림 속 고독한 인물들과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조르조 모란디의 정물화 속 수병들?
"저는 모란디의 수병입니다."
"저는 호퍼의 피사체입니다."
이렇게 전했을 때 상대가 바로 이해해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경험과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비록 그 그림을 잘 아는 사람일지라도 거기에서 무엇이 재우와 닮았다는 건지 반추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 애초에. 나는 나 자신을 잘 아는가 말이다. 내가 나를 성자로 믿고 있다고 해도 누군가는 나를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기괴한 악마처럼 여길 수도 있었고 조르주 드 라투르의 그림 속 야비한 카드 게임 상대처럼 느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다.
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다 내가 그런 곳에 쓰러져 있었는가에 관한 거겠지. 그는 먼 곳으로 떠난다고 했다. 그러니 영영 열리지 않을 봉서에 은밀한 비밀을 담듯 그에게 털어버리는 거다.
다시 한번 나를 하나의 그림이라고 생각해보자.
비록 완성된 모습은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 시점에서 가장 가까운 구릉과 골짜기들, 어두운 음영들을 안내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 나는 하나의 미완성작이다. 이렇게 최면을 걸어야만 골짜기의 바람과 축축함에 동요되지 않고서 덤덤하게 설명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문수는 비행기에 올랐다. 고향의 하늘이 순식간에 멀어지더니 어느새 기체가 구름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낯선 빛과 풍광이 포위망을 좁히며 비행기 주변을 휘감았지만, 겁이 나기는커녕 참으로 오랜만에 평화로움을 느꼈다.
스튜어디스가 가져다준 맥주를 한 모금 삼키며 문수는 도슨트 선생이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우려와 달리 가감 없이 그간 겪은 일들을 털어놓았다. '가까운 사람에게도 쉽게 하지 못할 이야기를 들려준 건 아마도 내가 떠나는 사람이라서 그런 거겠지'하고 문수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으레 떠나는 자에게 관대하니 말이다. 그는 이제 재우의 쓸쓸한 기억이 다시는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하도록그무형의 짐짝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이런 경우에는받는 사람을 누구라고 써야 할까? 안전수칙 책자 귀퉁이에다 문수는 이렇게 끄적였다.
받는 이 :거기 아무런 근심 없는 누군가.
그리고 한참 후에 다시 이렇게 덧붙였다.
과연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의 첫번째 행선지는 리스본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이 큰 실수였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든 길목 길목마다 기훈과의 추억이 어려 있던 탓이다. 그는 사그레쉬를 한 박스 사다가 연거푸 마신 다음, 한 주 내내 숙소에만 박혀있었다. 높은 천장에 생뚱맞게 박힌 푸른 아줄레주 타일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는 어쩐지 자신이 물가를 벗어나지 못할 운명은 아닐까, 마치 바다의 파도 장식이 될 것처럼 포세이돈이나 사이렌의 부름을 받은 건 아닐까 하는 괴이한 운명론에 집중하려 애썼다. 그가 외투의 안주머니에 넣어 온 엽서에도 안개 '바다'의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은가?
꼭 1년 같은 한 주가 흐르고. 마드리드에 사는 친척을 만나기 위해 출발했다가 그녀가 2년 전 발렌시아라는 해안 도시로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스치듯 떠올린 이 운명론은 곧 확실해졌다. 그는 몇 주간 도시의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충전의 시간을 누린 다음, 이번에는 작정하고 독일을 거쳐 북해 연안의 어느 나라든 방문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잠시 머물려했던 함부르크에서 붉은 어시장 건물에 마음을 빼앗겨 그만 눌러앉게 되었다.
체류 허가를 신청해야 하는 날 직전까지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문수는 어시장 장물을 베를린으로 나르는 일을 구할 수 있었다. 군말 없이 쉬지 않고 일하는 그를 시장 사람들은 좋아했고 계속 일거리를 주었다. 베를린으로 이어지는 24번 아우토반이 자유로 만큼이나 익숙해질 무렵. 한밤중 운전석 천장에서 돌무더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와 문수는 화들짝 놀랐다. 대기조로 곁에 앉아있던 동료가 그의 모습에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저건 돌이 아니라 우박이야, 문수. 4월이면 종종 떨어져 내리지."
"우박이라고? 나는 또 까마귀나 고릴라의 역습인줄 알았네."
"빗자루 같은 걸 하나 챙겨다녀."
"빗자루를? 왜?"
"움푹 파인 천장을 펼때 아주 유용하거든."
시간과 계절은그의 트럭보다도 빠르게 내달렸다. 드문드문 우박이 내리는 낯선 봄이 지나가고. 푸근한 공기가슈프레 강줄기를 타고 도시 사방으로 퍼지는 초여름이 왔다. 모처럼 시간 여유까지 생긴 문수는 강변을 따라20킬로미터를 내리 걸었다. 배가 고파서 도저히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선로 밑에 자리한 맥도날드를 발견한 그는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갔다. 게 눈 감추듯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어치우고 만족스럽게 콜라를 넘기던 문수는 습관적으로 기억 저편으로 밀려난 의무를 상기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짐을 내려놓았는가.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도슨트 선생의 짐이라도 멀리 떨궈놓았는가?
아직 해치우지 못한 숙제 탓에 울적한 기운에 잠기려던 찰나. 한 무리의 서커스 복장을 한 사람들이 우르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 가운데에는 비교적 점잖은 복장 때문에 더 눈에 띄는 작은 체구의 동양인 남자가 있었다. 그는 짧게 깎은 머리에 목에는 나비넥타이를 달고, 이 여름날 고동색 반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말은 또 어찌나 많은지!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동료들과 말을 섞으며 이따금 껄껄 대거나 낄낄 댔다.
"테아터 피플."
넋이 나간 문수의 귓전에 대고 점원이 속삭였다. 이 기차역 근처에 유서 깊은 공연장이 있어 출연진들이 수시로 들락거린다는 귀띔도 해주었다. 주문을 마친 서커스 단원들이 다시 우르르 빠져나가고, 나비넥타이를 맨 남자만 창가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무지개 한 줄기가 작은 펭귄을 이곳까지 태워다 준 다음 홀연히 사라진 것만 같았다. 문수의 시선을 느낀 단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한국 사람?"
그 갸웃거림마저 꼭 펭귄 같아서, 문수는 무의식 중에 자신에게서 생선 냄새가 나는 건 아닌가 옷깃을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아아! 내가 한국말로 떠들어 댈 말상대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동향인을 알아본 남자가 문수의 곁에 바짝 붙어 앉더니 묻지도 않은 자기 소개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회화 전공자로 스무살 중반에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왔다가 독일로 건너와 연극 의상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조금 전 서커스 단원의 무지개 빛깔 유니폼 창조자가 바로 이 작은 오즈의 마법사였던 것이다. 그는 말끝마다 '자네' 라던가 '했다네' 를 붙이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문수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무대'라고 고백했을 때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다분히 연극적이라는 면에서 그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은 없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인연이라는 게 뭔지.
그렇게 베를린을 방문하는 매주 수요일마다, 문수는 선로 아래 식당에서 무대를 만나밤늦도록 그의 수다를 들으며걸었다. 그리고는 다시 트럭에 올라 함부르크의 셋방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슈프레 강변을 걷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흡사 소설 '긴긴밤'의 노든과 치쿠처럼 희극적이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지나가는 사람들은 한번 씩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의 모습을 돌아보곤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