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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아 Dec 15. 2021

당신을 닮은 뒷모습


문수(N)


나는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로 인해, 음악으로 인해, 그림으로 인해 새로운 여정을 떠났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은 분명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을 것이다. 가져갈 것과 두고 갈 것을 벌써 오래전 정리해두었을 것이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채로 문 앞에 서있는데. 때 마침 지나가던 누군가가, 어느 문장이, 어떤 선율이 당신의 손에 열쇠를 쥐어주는 것이다.


티켓 한 장을 건네는 것이다.


문은 닫힌 적이 없는데.

아니 문 자체가 없었는데.

당신은 문이 열리는 것을 본다.

그리고 걸음을 내딛는다.


자. 이제 신은.

어디로 나게 될까?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퍼스널 도슨트 제이

두 번째

당신을 닮은 뒷모습





문수는 내비게이션에 포항을 목적지로 찍 트럭에 시동을 걸었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가 복하천의 검은 쟁반 같은 수면이 오른쪽에 나타날 즈음, 문득 이제와 그 바다를 혼자 찾아간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몇 시간 전 담배 맛을 잃었을 때처럼, 달리려던 의지가 증발하고 말았다. 그는 쉼터에 트럭을 세우고 핸들에 머리를 기댄 채 어둠 속을 내달리는 차들이 내뿜는 한숨 같은 연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서울의 집으로 방향을 돌렸다. 어둡고  빈 집을 마주하기 겁이 나 일부러 길을 돌아갔다. 해가 높이 솟은 다음에 들어갈 참이었다.


새벽의 도시는 고요했다. 빌딩들은 미명에 휩싸여 뿌연 빛을 발하고 있었고 한강 위로는 자욱한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어느 시점에 그는 강변에 자리한 대형 병원 옆을 지나는 자신을 발견했다. 많고 많은 길 가운데 하필 그 길목으로 접어든 자신을 모질게 나무라면서 문수는 속절없이 작년 이맘때를 떠올렸다.


기훈의 관을 문수가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다. 상복을 갖추어 입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꼭 지금처럼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보고 있다. 는 돌아서기 전에  동생의 영정사진을 보려고, 그 사진에라도 작별 인사를 건네려고 좌로 우로 움직였지만 도무지 그 애틋한 얼굴은 보이질 않았다. 울컥. 기훈의 얼굴을 가린  생생하고 화려한 들을 모조리 뽑아 조문객의 얼굴에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에 일었다. 그러나 지독한 겁쟁이였던 그는 자신을 알아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자 죄인처럼 빠져나왔다.


안에서 올라오는 목소리가 가라앉기를 바라며 술을 다. 연거푸 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목소리는 잠잠해지기는 커녕 더 크게 비명을 질러댔다. 이 한심한 놈. 하나뿐인 동생의 마지막 얼굴도 보지 못한 바보천치같은 놈! 현관문을 열고 쏟아지듯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노견이 된 이브가 굳어가는 뼈마디를 움직이며 문수에게 다가왔다. 곁에 바짝 붙어 앉으며 얼마 남지 않은 체온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콧잔등을 그의 에 얹으며 말했다.


문수.

나는 말이야.

네가 동생을 보기 위해 거기까지 간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해.

그것도 굉장한 용기였잖아?

내가 너의 용기를 아는데

네 동생이라고 모르겠어.

다 알 거야.

다 알고서 갔을 거야.


이제 의 곁에는 그토록 다정한 위로를 건네던 개도, 삶의 이유였던 동생도 떠나고 없다. 두 다리를 잃은 것처럼 아침마다 몸을 일으키는 일이 부쳤. 다리가 없는데 트럭이 도대체 무슨 힘으로 달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언제 자신의 트럭이 멈추고, 자신이 멈추고, 세상이 멈추어 버릴지 모른다불안한 마음을 품문수는 정막이 감도는 한강 주변을 맴돌았다. 어느덧 강 위의 물안개가 걷혔다. 조금 있으면 이 도로 수많은 차와 삶의 기으로 가득 찰 것이다. 문수는 그전에 조용한 곳에 몸을 쉬고 싶었다.


그의 도주를 는 것처럼 거리의 신호 한동안  파란 불이었다. 그러다 반포대로에 이르러 빨간 신호에 걸리고 말았다. 길 건너 요새 같은 전시관 건물이 문수의 눈에 들어왔다. 건물 외벽에 구름바다 위에 올라선 남자의 그림이 큼직 막한 사이즈로 걸려 있었다. 그림 속 인물은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고 싶을 만큼 단호하게 등을 진 채 자신의 왕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수는 진경의 친구가 전시에 관하여 뭐라고 말했는지 떠올보았다.


걷다가

벽을 쳐다보고,

이해하는 척하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걷는 것.


제 삶의 소판같은 그 방황의 걸음을 는 것이 지금 꼭 필요한 일인지도 겠다고, 문수 생각했다.






사무실은 새로 영입된 신입 도슨트들을 위한 워크숍으로 시끌벅적했다. 재우는 한때 자신에게도 저들이 지닌 호기심과 열정,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회복력이 있었음을 회상했다. 하지만 연희를 보낸 이후 페이스를 되찾까지 걸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미래에나 직면  알았던 음과 몸의 쇠퇴가 일찍부터 그를 잠식 것이다.


가 북적이는 사무실을 가로지르자 모두 자연스럽게 길을 주었다. 신입 몇이 그 유명한 도슨트와 휠체어를 쳐다보다가 금방 시선을 거두었다. 재우는 정수기에서 전시 도록과 스크립트를 챙겨 서둘러 방음 부스로 들어갔다.


앞으로 한 달. 그는 카스파르 다비드 브리드리히 전시의 퍼스널 도슨트를 신청하는 사람들에게 가이드를 제공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사전 예약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과 연결될지 모른다는 점 신청자가 몰릴 때도 있고 아예 없을 때도 있다는 수가 적잖은 부담을 주었지만, 기질 개선 훈련의 일환으로 여기며 감내하기로 했다. 그림의 무수한 잠재력을, 그중에서도 바닥에 가라앉은 존재를 일으켜 세우는 구원의 힘을 꼭 필요한 이들에게 전달하겠다는 목표의식이 내성적인 그의 성향을 조금씩 바꾸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열정에 불을 지소중한 사람이 세상 어딘가 존재할 때의 얘기였다.


재우는 다시 연희에게로 귀결되는 의식을 애써 떨쳐내며 시계를 보았다. 개시  30분이 지지만 도슨트 신청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대기 시간이 길어질 것을 대비하여 챙겨놓은 월간지로 손을 뻗었다.  순간. 알림이 울리며 부스에 설치된 모니터 화면 위로 신청자의 정보가 떠올랐다.


신청자: 김문수 / 남성 / 37

최근 전시 방문 이력: 20년 전

퍼스널 도슨트 신청 이력: 없음

작가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음

전시관내 위치정보 제공: 동의

대화 내용 녹음: 동의

가이드 희망시간: 14:40


등받이에 기대어 두 손을 포갠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노련한 도슨트답게 전시관의 동선, 소개할 작품에 얽힌 이야기들, 서른 후반의 남성 관람객에게 가이드를 제공했을 때의 경험들을 빠르게 환기했다. 차를 한 모금 넘기고 마이크를 세팅했다.


연결 5분 전이 되자 전시관 도면과 관람객의 위치가 표시된 창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가이드 신청자의 위치가 빨간 점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남자는 전시장 입구가 아닌 로비 창가에 서있었다. 재우도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난밤 폭설의 여운을 떠안은 흐린 구름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가스파르의 세계로 누군가를 안내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흐린 좋아하세요?"


문수는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창가에는 그 말고 아무도 없었다. 고객이 당황한 것을 알아챈 재우 마이크를 당기며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쓰고 계신 헤드폰 위치가 제게 보이거든요. 오늘 전시를 안내할 제이라고 합니다."


문수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 또, 내 머리가 이상해진 줄 알고... 김문숩니다."


"반갑습니다. 퍼스널 도슨트 가이드는 처음이시라고요."


"네네."


"궁금한 게 있으면 편하게 물어보시고, 오래 보고 싶은 그림이 있다면 머물러 계서도 됩니다. 도중에 가이드를 스톱하셔도 되고요."


"그렇군요."


"그럼 전시장으로 들어가볼까요?"


또 한 번 '네네' 대답하며 입구로 걸음을 옮기던 문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네?"


"흐린 날이요."


이렇게 묘하게 시작된 관람은 문수에게나 재우에게나 전에 없는 특별한 경험이 되었다. 학창 시절 이후 전시장을 찾은 적이 없던 문수는 쉽게 아는 척을 하지도, 눈치를 보지도 않고 슨트에게 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사람이 저 자세로 앉아 있는 게 가능합니까?'

'그렇게 어두운 밤중에 무슨 수로 저걸 보고 그렸답니까?' 

'모 게 의미가 있다면, 작가가 아무 생각 없이 그려 넣은  정하나도 없다는 겁니까?'


낯설고 솔직한 질문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지만 재우서는 이런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에게 나무 그리는 법을 알려주는 것처럼 즐겁게 여겨졌다. 가끔씩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를 시험하고자 가이드를 신청해 역으로 가르치려 드는 경우 있었다. 작품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가이드를 신청해 불편한 기류를 만도 적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문수는 반가운 고객이었다. 그가 재와 동갑이라는 점도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통화하는 듯한 분을 조성해 긴장 덜어주었다. 이런 편안함을 문수 역시 느끼고 있었다. 가이드가 두 시간을 넘어가고 있었지만 양쪽 모두 대화에 열중한 나머지 누구 하나 관람을 마치려 들지 않았다.


마침내 포스터에 실린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그림 앞에 서게 된 문수는 전시관 앞에서 떠올렸던 몇가지 질문들을 꺼내지 않기로 했다. 재우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림 속 피사체에 관한 의미는 대체로 열려 있으며, 보는 이의 생각으로 완성 된다는 것을 달은 참이었다. 암녹색의 프록트를 입은 남자가 애초에 왜 산을 올랐고, 거기서 무슨 생각을 했으며, 정상에서 내려왔는지 뛰어내렸는지는 모두 문수에게 달린 문제였다. 이야기를 천천히 완성해보기로 하고, 대신 다른 질문을 도슨트에게 던졌다.


"이 작가  이렇게 외롭게 보이는 그림 그린거죠?"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어린 시절 형제자매를 잃었어요. 그중에서도 남동생이 호수에 빠져 죽은 일이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하죠.  사고 이후 작가 죽음이나 철학적인 관념들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되었을 겁니다. 그게 그림에 투영된 것이고요."


이윽고 '아아'하는 괴로운 탄성이 재우 이어폰 너머로 들려왔다. 괜찮은지 물으려 할 때 문수가 먼저 다급하게 말했다.


"스톱... 하겠습니다."


퍼스널 도슨트의 원칙 하나. 고객이 스톱을 원하면 곧장 가이드를 멈추고 이어폰을 뽑는다. 하지만 재우는 전원을 끄지 않았다.


그림과 관객이 강렬하게 만나는 순간을 재우는 잘 알고 있었다. 주선자라도 된 것처럼, 둘 사이에 불꽃이 튀며 영영 끊을 수 없는 선이 연결되는 면은 그에게 경이로운 순간이었고 큰 보람이었다. 다만 이 기적은 생각보다 흔히 일어나지 않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 순간이 펼쳐질 듯한 예감이 들었다.


문수의 위치를 가리키는 빨간 불이 그 자리에서 계속 깜빡다. 재우는 홀린 듯 점을 응시한 채, 관객이 바라보고 있을 그림을 떠올렸다. 그렇게 두 사람참 동안. 다른 장소에서 같은 그림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문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도슨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듣는 이가 없다 각한 문수는 안심한 듯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멈추어 있던 빨간 점이 그림 앞으로 바짝 다가섰.


"작년 오늘... 내 동생과 개가 죽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문수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당신은. 죽지 말아요."


그 말은 분명 그림 속 방랑자에게 건넨 말이었을 테지만, 재우에게는 꼭 자신에게 거네는 말처럼 들려왔다. 일면식 없는 남자가 매일 죽음을 생각해온 재우의 심정을 알 턱이 없는 데도.


것은 위로였다기 보다는 치부를 들킨 느낌이라서. 

남의 비밀을 엿들은 비겁한 사람이  것 같아서. 

재우는 한 박자 늦게 화들짝 놀라며

이어폰을 벗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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