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다른 태국> 잔잔한 축적

태국 아유타야 | 2

Apr 25. 2025

아유타야에서의 마지막 날.

해가 본격적으로 뜨기 전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소엔 느긋하게 체크아웃 시간을 지키는 편인데, 이 날만큼은 예외였다.
아침 9시, 두 번째 숙소를 나서며 하루를 시작했다.

첫 번째로 향한 곳은

싸판 빠 딘써(Saphan Pa Dinsor),
‘연필 숲 다리’로 불리는 오래된 벽돌 다리다.
구글 지도에 의존해 도착한 그곳은, 아유타야 라차팟 대학교 한켠,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만 닿을 수 있는, 말 그대로 숨어 있는 다리였다.
길은 공사 중이었고, 주변은 여느 대학교의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여기 맞나...? 싶을 즈음, 정말로 다리는 그곳에 있었다.

붉은 벽돌로 쌓인 작은 아치 다리.
누군가는 무심코 지나칠 법한 이 구조물에 나는 괜히 마음이 먹먹해졌다.

흙 위에 벽돌 하나하나를 쌓아 만든 다리.
세월을 견뎌낸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주변엔 작은 개울이 흐르고, 그 물 위로 다리는 여전히 기능하고 있었다.
멋지고 화려하진 않지만, 오히려 그 ‘지나침’이 없는 모습이 좋았다.

그 다리 앞에서, 나는 문득 내 인생을 돌아봤다.
내가 살아온 시간을 하나의 다리처럼 본다면,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쌓아왔을까.
마음은 언제나 분주했지만, 무언가를 단단히 축적한 경험은 많지 않았다.

이번 출사 프로젝트가 어쩌면 처음으로 나의 시간을 ‘축적’하는 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은, 다리를 보고 난 후 더 단단해졌다.

그곳에서 조용히 사진을 남기고 다음 장소로 향했다.

시간을 건너는 문, 왓 프라응암(Wat Phra Ngam)

그 다음은 ‘시간의 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왓 프라응암.

100년 넘게 자란 보리수나무 뿌리가 오래된 벽돌 아치를 감싸며 자연이 만든 하나의 문을 이룬다.
이 문을 지나면 과거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서 사람들은 이곳을 '시간의 문'이라 부른다.

사원의 규모는 작다.
그런데도 놀라울 만큼 정돈되어 있다.
알고 보니, 이곳은 불교 승려가 상주하지 않아 오랜 시간 방치되었던 사원이었다.

그런데도 이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관리해온 덕분이었다고 한다.

정성스레 가꿔진 정원, 단정한 기와, 쓰레기 하나 없는 경내.

모든 것이 손길이 닿은 흔적이었다.

이곳에서 찍은 사진은, 왠지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 오래 남을 것 같다.

하얀 탑의 침묵, 왓 푸카오통(Wat Phu Khao Thong)

세 번째 장소는 아유타야 외곽, 왓 푸카오통.

처음 이곳을 향하니 눈에 띄는 건 먼저 큰 호수가 보였다.

작지않은 규모에 호수공원처럼 조성이 깔끔하게 되어 있었고,
입구엔 나레수안 대왕의 동상이 크고 엄숙하게 서 있었다.
그를 지나 더 들어가면 눈부신 하얀 대탑(첼레디)이 우리를 맞이했다.

이 탑은 1387년, 아유타야의 왕 람퐁 왕(Ramesuan)이 버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 기념으로 세운 사원이다.

탑의 구조는 매우 독특하고 이국적이다.
위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꼭대기에 오르면 주변 평야와 마을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관광객이 많지 않아 조용했고, 주차 공간도 넉넉하고 그늘도 많아 오히려 ‘출사지’로는 최적의 장소였다.
아유타야가 주는 정적인 느낌이 이곳에서 더 깊게 느껴졌다.

라마 5세의 흔적, 반 쿤 피탁(Baan Khun Phithak)

이번 출사의 마지막 장소는 조금 특별했다.
사원도 아니고, 유적도 아닌 한 오래된 주택.
‘반 쿤 피탁’
앙통과 아유타야의 경계 즈음에 위치한 오래된 목조 저택이다.

알고 보니 이곳은 태국 영화 <아농(อานง)>의 촬영지로도 쓰였고,
무속적인 에피소드로도 꽤 알려진 장소였다.

하지만 내겐 그런 이야기보다, 이 집의 깊은 역사성과 감각적인 공간 구성 자체가 더 인상적이었다.

집의 주인이었던 Khun Phithak은 당시 행정 공무원이었고,
이곳은 라마 5세가 하룻밤을 묵은 장소로도 전해진다.
라마 5세는 태국 근대화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가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집은 일종의 ‘살아 있는 기록’처럼 느껴졌다.

집 안은 마치 작은 박물관 같았다.
그 시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전통 가구, 소품, 조명까지.
누군가 지금도 이 공간을 아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사람은 살고 있지 않았고 지금은 거의 흉가처럼 방치되어 있었지만, 기운은 묘하게 맑고 평온했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컷을 찍고, 우리는 집으로 복귀했다.

축적의 여행

이번 아유타야 출사는 ‘나’를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한 시간이었다.

사진은 어떤 순간을 담는 행위지만, 그 순간을 통해 드러나는 건 결국 ‘내가 보는 방식’이다.
내가 지금 보고 싶은 건 무엇인지, 내가 앞으로 가고 싶은 방향은 어딘지.

이 조용한 도시에서, 나는 그 단서를 조금 더 선명히 붙잡은 것 같다.

익숙했던 도시, 그러나 전혀 다른 결로 나를 채워준 장소들.

시간을 쌓는다는 건, 내 마음의 형태가 바뀌는 경험이란 걸 이번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다.

keyword

Brunch Book

강라마 소속 Moment11 직업 출간작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삶에 대해 들어오는 직관을 글, 그림, 사진으로 이야기 나누는 한 사람.

구독자 22

이전 06화〈알고 보면 다른 태국> 익숙한 몰입〈알고 보면 다른 태국> 낯선 조화다음 0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