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잠시 쉬는 곳
사람은 사라졌지만, 공간은 여전히 말을 건다.
천장이 높은 건물 안,
녹슨 기계들이 오랜 침묵을 품은 채 웅크리고 있다.
한때는 이곳에서 종이가 쏟아졌고,
기계음이 하루를 가득 채웠을 것이다.
지금은 다만,
빛이 천천히 들어오고
바람이 벽을 쓰다듬는다.
그 모습이 꼭 오래 앓다 잠시 숨 고르는 사람 같다.
처음엔 낡은 철제 장치들이 눈에 띄었다.
기묘하게도 그 형체들이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인간이 만든 것인데, 인간이 사라지고 나니
도리어 기계가 생명을 얻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곳은 반복의 무대였다.
같은 동작, 같은 리듬, 같은 하루.
그런 하루들이 쌓여 종이를 만들고,
작은 삶들을 떠밀었을 것이다.
반복은 지루하거나, 무의미하지 않다.
그건 때로 아주 조용한 축적이며,
삶이 틀어지지 않도록 붙드는 고정점이기도 하다.
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구조물들이,
도리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빽빽한 구조물 사이로 들어오는 빛줄기,
누군가의 땀과 무게가 배어 있을 법한 바닥,
그리고 텅 빈 듯 가득 찬 공기.
이곳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멈춘 것도 아니다.
이곳은 조용히 살아 있다.
그리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득 내가 이곳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이곳이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허가 아니라 ‘쉼’.
버려짐이 아니라 ‘숨’.
그림자가 잠시 쉬고 있는 곳이다.
[Kanchanaburi Thai Paper M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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