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장님이 되고 싶었던 거야!
스무 살.
사회에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 줄 알았다면, 실업계 고교를 가야 했었을 터인데 대학 입학을 목표로 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인문고교를 졸업하던 해, 나는 대학 입학 등록을 하지 않았다.
국문과를 다니고 국어선생님이 되리라 했던 내 꿈은 이과로 전향하면서 굳이 원하지 않는 학과에 수백만 원에 달하는 등록금을 보는 순간 이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돈을 모아야 한다거나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생각을 현실로 실현했다.
갓 스물 되던 학교를 졸업하던 해 우리 집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지하철 역이 비포장된 밭두렁 같은 땅위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1호점 이마트가 덩그러니 들어와 있었다.
타원형 정문이 우람하게 보이는 그 마트와 지하철로 가는 길 입구에 5층짜리 단층 건물이 있었다.
재수할 마음이 나지 않았던 나는 엄마에게 '우리 김밥 장사할까'
지하철 입구를 들어가려면 3000세대가 넘는 아파트 주민들이 그 앞을 지나가야만 하니까 분명 먹는 사람이 있다니까 엄마!
당시엔 버스가 없는 동네여서 오로지 지하철이 교통수단이었다.
'입지가 정말 좋아, 그냥 3평이어도 팔 수 있겠어.
깨끗한 김밥 집을 내야겠어.'
그로부터 4년 후쯤 대학로에 '김가네' 김밥 분식집이 생기고, 학교 앞 포차 떡볶이 오뎅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깨끗이 단장된 가게에서 김밥을 먹는 일이 그 삼십여년 전에는 놀라운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우리 동네에 입지가 좋은 그 위치에 2년 만이라도 김밥 집을 열어서 돈을 벌어보고 싶다'라고
나는 그 김밥가게 1호점이 오픈도 하지 않았던 4년 전에 김밥 집 오픈이라는 놀라운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계속 몇 주 동안 김밥 재료를 사다가 한 번에 스무줄 정도를 말아 쌓아 두었으나, 여지없이 아버지의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라는 말로 단칼에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말씀은 그러하나 아버지의 손은 김밥을 서너줄 싸들고 등산을 가시거나 하였다.
맛은 있었나 보다.
5층 건물에 공실 한 칸이 내내 있더니 결국 작은 김밥가게가 문을 열었다. 중간에 확장도 한 번 할 만큼 문전성시를 이루던 그 김밥 집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5층 건물의 3개 층을 사들였다는 말이 돌았다.
이후 봄이면, 가을이면 계절 나들이를 갈 때마다, 김밥을 싸고 있을 때마다 엄마는 " 큰 딸 말대로 그때 했더라면 열씸히 김밥을 말고 엄마가 건물주 할 수 있었을 텐데"라며 너스레를 떠시곤 하였다.
혼자 생각하곤 한다.
나는 사업의 성취감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었음을
김밥으로 좀 더 일찍 알 수 있었을 터인데 늦게 깨닫게 되었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그 김밥 맛에 홀려서 뒤늦게 깨달았다.
왜 장사를 하려 했던가?
현실적인 기본 바탕을 이루고 나서야
진심으로 하고 싶은 꿈을 향해 갔어야 함을
찰나의 순간 방향을 잃었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에 푹 빠져버린 탓이다.
탓하기에도 너무 맛난 김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