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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기도설 Apr 29. 2024

어른들의 음식분위기

- 칼국수와 냉면

그녀는 '먹는 일'에 진심이다.

그녀와 내가 처음으로 먹방 동지애를 갖게 된 계기는 스물 한 살 가을이었다.

그녀는 대학생이었고, 나는 회사원이었다.

점심시간이 되기 한 시간 전쯤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 한 통.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동아리 동기 모임 말고는 나와 따로 만난 적은 없었는데, 수업이 휴강되어 집에 가려다 갑자기 내 생각이 났단다.


충무로역과 세운상가가 이어지는 진양상가.

그 앞에서 소국 한 다발을 들고 서 있는 청순한 그녀.

얼굴이 창백하리만큼 하얗고 머리는 단발, 하얀 블라우스에 긴치마를 입은 그녀가 서 있었다. 국민학교 동창이지만 우리가 직접적인 친구가 된 건 고등학교에서였다. 동아리 안에서 나는 국민학교 동창으로 그녀와 소통하며 다른 친구들과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졸업 이후 내가 먼저 안부 전화를 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나를 보러 온다니 낯설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그녀는 솔직하고, 상대방의 이야기 듣기를 잘하고, 말은 옮기지 않으면서도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잘했었다. 영화를 매우 아주 좋아하는 친구여서 고등학교 때도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아니, 시험이 내일모레여도 개봉하는 첫 영화가 있으면 야간자율학습을 빼고 갔다는 말도 들리곤 했었다. 그녀가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되려나 했지만, 그녀는 화학을 전공했다.

늘 신비했던 그녀가 나와 점심을 먹겠다고 온 것이다.


"명동칼국수보다도 여기 진양 칼국수가 더 맛있다고 생각하는데, 칼국수 괜찮아?"

"응, 칼국수 좋아, 네가 맛나다고 하는 거 보면 분명 맛있을 거야"


엄지손톱 두 개를 합친 크기 정도의 작은 만두가 5개 고명으로 얹혀 있고, 볶은 소고기 고명과 넉넉하게 호박이 들어 있는, 국물도 고깃국물만이 아닌 채소 수로 내어 담백하고 맑은 칼국수. 진양 칼국수.


칼국수를 보는 순간 그녀의 눈은 반짝인다.

맛이 어떠냐 묻기 전에 "음, 맛있어 맛이 너무 좋다.

아, 그리고 가을이잖아. 너 주고 싶어서 소국 사 왔어. 받아"  

그녀에게서 계절이 바뀌고,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에게

나도 꽃 한 송이라도 들고 가는 낭만이 생긴 건 이날이었다.


"다음 달에 동아리 동기들 모여 보려고, 그때 여기서 모일까, 내가 살게, 어때?"

"아, 그거 좋겠다. 그러자"  


그녀가 다녀간 후, 나는 그녀에게 연락하여

충무로 진고개 물냉면을 먹으러 오라고
 "냉면은 찬바람이 불면 먹는 것이 참맛이야. 여름에 먹는 것보다도 더 맛있어, 꼭 오렴"


진고개 음식점에 앉아서 그녀가 내게 하는 말.

"학생인데 제대로 된 냉면 먹어서 너무 맛있고, 고마워" 

이제 스무 살이 넘은 지 얼마 안 된 우리가

이렇게 '어른들의 음식 분위기'를 어디 가서 느껴 보겠느냐며, 사회에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어른이 돼서 이런 음식을 먹으려면 어떠해야 하는지 많은 걸 생각하게 된다던 그녀.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 책이든 영화든 하물며 앞사람 대화까지도 그걸 소비하는 걸 좋아하는 그녀.

그녀와 나란히 앉아서 '음, 으음' 맛있어서 감탄하는 소리를 같이 내며 도란도란 소박한 음식을 즐기며 늙어가고 싶다.

연신 감탄의 소리를 듣기 위해 맛집을 검색하고,

그녀가 집에서 만들지 않는 음식을 만들어 볼 것 같다.


소국을 들고 왔던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

그녀와 꼭 만나서 '면 종류'를 먹는다. 칼국수, 냉면 등

먹는 것을 진심으로 대한 먹방친구 결성의 시작,

그 가을 시월의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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